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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칸토의 지존’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파바로티 뛰어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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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호 17면

새로운 자유와 해방의 세계로 발을 딛는 제미.

뮌헨을 출발한 기차는 티롤 지역의 웅장한 알프스 산지를 지나 이탈리아 베로나와 볼로냐를 거쳐 동쪽 아드리아 해안으로 달린다. 휴양지로 유명한 리미니의 다음 역은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 조아치노 로시니(1792~1868)가 태어난 페사로(Pesaro). 로시니를 기념하는 페사로의 로시니극장에서는 1980년부터 매년 여름 로시니 오페라페스티벌이 열린다. 페사로의 아름다운 바닷가를 찾는 관광객도 많지만 오로지 로시니의 음악을 듣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이곳으로 달려오는 로시니 골수 팬도 적지 않다. 올해 최고의 화제는 로시니 최후의 역작이자 노래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빌헬름 텔’(프랑스어로 초연되었으므로 원제는 ‘기욤 텔 Guillaume Tell’)이 1829년 파리 초연판 무삭제 버전(공연시간 4시간 이상)으로 무대에 오른다는 것. 더구나 1996년 이 페스티벌에 대타로 출연해 세계를 놀라게 한 뒤 현재 ‘세계 최고의 벨칸토 테너’, 일반적인 테너의 최고음 하이C를 뛰어넘어 ‘하이D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페루의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40)가 테너 주인공 아르놀트 멜히탈 역을 처음으로 노래했다.

이 배역은 전성기의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스튜디오 녹음만 남겼을 뿐 “목에 지나치게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실제 무대 출연을 거부했던, ‘테너를 오금 저리게 하는’ 최고난도 역할이다. 플로레스가 요리하는 ‘빌헬름 텔’을 보러 가는 길은 그래서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1 텔이 석궁으로 아들 머리 위의 사과를 명중시키는 장면. 2 억압과 천대를 겪는 스위스 민중의 운명에 고뇌하는 텔(니콜라 알라이모)과 아들 제미. 3 아르놀트(후안 디에고 플로레스)와 마틸데(마리나 레베카)의 마굿간 밀회.
4 게슬러의 횡포로부터 제미를 보호하는 마틸데.

독창적 지휘, 도발적 연출, 탁월한 가창력의 ‘3합’
8월 14일 오후 6시. 이미 메트 오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페사로 출신의 젊은 지휘자 미켈레 마리오티가 ‘아드리아틱 아레나’의 오케스트라 피트로 들어섰다. 역사적인 ‘빌헬름 텔’ 공연의 막이 오른 이곳은 올봄 손연재 선수가 은메달을 딴 체조 경기장이다. 로시니 페스티벌이 갈수록 인기를 모으면서 750석인 로시니극장이 비좁아진 탓에 스포츠 경기장인 이 아레나로 무대를 넓혔다. 페스티벌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개조한 1200석 극장에서 ‘젤미라’ ‘이집트의 모세’ 등 비교적 스케일이 큰 로시니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 올해도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나 ‘기회가 도둑을 만든다’ 같은 로시니의 희극들은 원래의 로시니극장에서 공연됐고, ‘빌헬름 텔’만 아레나 무대에서 선보였다.

이날 볼로냐 시립극장 오케스트라를 이끈 마리오티는 치밀하면서도 독창적인 해석으로 서곡에서부터 이미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관객들은 폭풍 같은 갈채와 함께 극장이 떠나갈 듯 요란하게 발을 굴러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게 경의를 표했다. 볼로냐 시립극장 합창단 역시 뛰어난 역량과 집중력으로 합창이 많은 이 스케일 큰 작품을 각별하게 빛냈다.

‘유럽의 68’ 반권위주의 운동 세대를 대표하는 영국 연출가 그레이엄 비크는 페사로의 ‘이집트의 모세’, 브레겐츠의 ‘아이다’ 등 최근에도 여전히 정치참여의식을 드러내는 도발적 연출로 끊임없이 화제의 중심에 서 왔다. 슬라이딩 도어로 무대면을 다양하게 분할한 이번 ‘빌헬름 텔’의 순백색 삼각형 무대와 화려한 의상의 색채감(무대 및 의상 디자인 폴 브라운)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 못지않게 스위스인들에 대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지배자들의 잔인한 통치를 묘사하는 데 있어 비크는 역시 혁명적인 신랄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오스트리아 지배자들이 스위스 민중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3막 축제의 발레 장면은 그 뒤에 이어지는 클라이맥스인 빌헬름 텔이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활로 명중시키는 명장면 및 스위스 민중의 3개 주 연합 봉기 장면을 더욱 극적인 감동으로 다가오게 했다. 천장에서 붉은 계단이 서서히 내려오고 텔의 아들 제미가 그 계단을 올라서는 4막 피날레 장면은 ‘새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관객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빌헬름 텔’의 원작자 프리드리히 실러가 의도했던 대로 ‘개인과 사회의 요구가 일치해 양자가 함께 새로운 조화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모습이 오페라 무대 위에서 장엄하게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5 오스트리아에 맞서 연합한 스위스 3개 주 민병대를 지휘하는 아르놀트.

아드리아해의 아레나를 가득 채운 감격의 갈채
‘체 게바라’ 같은 외모로 등장해 압제자를 향한 분노를 격렬하게 표현한 텔 역은 바리톤 니콜라 알라이모가 맡았다. 투사적 강인함과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자애를 훌륭하게 조화시킨 그는 3막에서 아들 머리 위의 사과를 쏘기 직전에 부르는 ‘움직이면 안 된다, 아들아(Sois immobile)’로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다. 화살을 사과에 명중시키고 아들의 생존을 확인한 직후 탈진해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연기로 더욱 큰 공감을 샀다.

투명하게 빛나는 고음과 흠잡을 데 없는 레가토로 54회의 하이B와 19회의 하이C를 노래하며 ‘벨칸토의 지존’임을 확인시켜 준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는 이날 페사로를 찾은 비평가들의 극찬을 이끌어냈다. ‘살인적인 아리아’로 유명한 아르놀트의 4막 아리아 ‘내 선조들의 집이여(Asile héréditaire)’를 부른 뒤 객석에서는 감격에 찬 박수가 멈출 줄을 몰랐다. 파바로티의 음반에서조차 긴장과 힘겨움이 느껴지는 아리아지만, 이미 휴식 포함 5시간 가까이 지속된 공연임에도 플로레스의 고음에서는 지친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페라 비평계의 군주’로 불리는 위르겐 케스팅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에 기고한 신문 지면 절반 정도의 긴 리뷰에서 “플로레스는 (그에 대해) 최고로 높아진 기대를 다시금 충족시켰다”고 썼다. 그는 “아르놀트 역을 대체 어떤 테너가 부르느냐가 초연 때부터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면서 “1837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이 역을 부른 테너 질베르 루이 뒤프레가 하이C를 흉성으로 불러 대성공을 거뒀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에게 밀려난 초연 테너 아돌프 누리는 큰 충격을 받고 2년 뒤 우울증으로 투신자살했다”는 에피소드도 소개했다.

명징하고 강렬한 음색으로 아르놀트의 연인 마틸데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마리나 레베카 역시 플로레스 못지않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크리스티나 마이트 칭케는 “페사로 페스티벌에서는 이른바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위기’라고 불리는 현재의 상황을 전혀 실감할 수 없었다”면서 이 음악적으로나 무대 면에서나 완벽에 가까웠던 공연을 아낌없이 칭찬했다. 조국과 연인 사이에서 찢기는 아르놀트의 심경을 깊이 있게 드러낸 플로레스의 표현력과 성악적 테크닉의 완벽함, 그리고 로시니 특유의 ‘프랑스어 오페라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소리를 들려준 레베카의 가창은 근래 보기 드문 환상의 조합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오페라 온라인 매거진 ‘오페라 투데이’에 기고한 마이클 밀렌스키는 순백의 이 무대가 박물관 전시실을 옮겨놓은 듯한 외형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붉은 계단은 박물관 바깥의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통로”라고 썼다. “빌헬름 텔은 오페라 속 독재자 및 악당들과 결별하는 로시니의 감동적이고 평화로운 작별인사를 향해 아들 제미를 이 순수한 세계로 내보냈다.”

이 공연을 본 벨칸토 시대 작곡가 도니체티는 2막에서 텔·발터·아르놀트가 함께 부르는 남성 3중창에 감동받아 “1막과 마지막 막은 로시니가 작곡했지만 2막은 하느님이 작곡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아마 도니체티는 프랑스어 4막본이 아니라 로시니 스스로 축약한 이탈리아어 3막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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