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축구에 평생 바친 김용식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한국 축구계의 현역 원로인 김용식(61)씨가 25일 회갑을 맞음으로써 반세기에 걸친 그의 축구생애를 장식한다. 현재 한신 부동산(신탁은행의 방계회사)의 감사역으로 신탁은 축구 「팀」의 「코치」를 맡고 있는 김씨가 축구를 시작한 것은 1920년대의 황해도 신천 국민교 시절. 1910년대의 유명한 장로교 부흥목사인 김재두씨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고향에서 이유해(60·전 서울신문 및 경향신문 체육부장)씨 등과 「볼」을 차다가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와 승동국민교(현재 인사동)와 경신 중을 마쳤다.
경신 중 재학 때는 졸업을 앞두고 광주학생 사건의 여파로 일경과 대항타가 1백 70명의 집단 퇴학생의 주모자로 걸려 1년을 피신했다는 것.
김씨가 축구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보성전문(현 고대) 시절. 보전에 입학했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평양의 숭실전문을 1년 다니다가 경·평전 때문에 다시 보성에 「컴·백」한 김씨는 졸업반 때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일본 축구대표「팀」의 유일한 한국인 선수로 출전, 우승 후보인 「스웨덴」을 3-2로 물리치는데 수훈을 세워 각광을 받았다.
이때 김씨는 축구로 유명했지만 「스피트·스게이팅」의 종합 선수권자로도 단언 「톱·클라스」에 있었다. 그 자신도 「베를린·올림픽」에는 민족 차별이 심한 축구보다도 빙상으로 출전하려 했다는 것. 그러나 35년 「닉고」(일광)의 최종선발전에서 실격의 고배를 마신 뒤로는 「스케이트」를 불사르고 축구에만 전념하기로 했다고-.
보전을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꿈꿔 일본의 조대에 다시 입학한 김씨는 2차 대전 때문에 귀국, 선수 겸 「코치」로서 배재중의 김일배 민병태 박대종 등 쟁쟁한 대표급 선수들을 양성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전업의 「코치」겸 선수로 「런던·올림픽」에 출전했고 52년 은퇴경기를 마친 43세때까지 현역선수로 병참·헌감에서 대표선수를 지도, 양성했다.
그는 대학시절 가정 교사인 「킨슬러」 여자선교사로부터 영어를 착실히 배워 축구계서는 영어 통의 1인자로 뽑히고 있다. 그래서 50여회의 해외 원정이외에도 회의 대표로도 10여 차례나 참석했다.
또한 협회의 부회장직까지 맡았으며 작년 「월드·컵」 서울 예산 대회 때는 한국 대표 「팀」「코치」로 활약했다.
그러나 가정적으로는 비교적 불운해 부인이 10년 넘게 병상에 누워있고 딸만 다섯을 두어 회갑 잔치는 생각도 못했던 것.
이에 이유형씨 등 친지들이 준비위원회를 조직, 임흥순씨를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25일 체육회 강당에서 회갑연을 베풀어 축구계에 미친 그의 공로를 기념키로 했다.
특히 이날에는 김씨가 아직도 계속중인 「볼·컨트롤」의 묘기를 장점동씨(체육영화 제작자)의 「필름」을 통해 보여 줌으로써 그의 업적을 길이 기념하리라는 흐뭇한 얘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