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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참사] 1080호 생존자가 전하는 최후 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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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번 화재 사고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1080호 전동차의 최후의 순간이 베일을 벗고 있다.

'비운의 1080호'는 기관사 최상열(39)씨가 전원키를 빼 운전실을 빠져 나오면서 선장없는 배처럼 표류하다 화염 속에 묻히고 말았다. 전원키를 빼는 순간 열렸던 출입문이 닫히면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승객들은 뜨거운 불길 속에서 타들어갔다.

다음은 2호 객차에 앉아 있다가 崔기관사와 함께 극적으로 현장을 빠져 나온 승객 이영희(38.여.대구시 달서구 월성동)씨가 전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1080호 전동차가 중앙로역 구내에 도착한 시간은 18일 오전 9시56분. 승강장에는 벌써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출입문이 열리더니 곧 닫혔다. 이어 "승객 여러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세차례 반복됐다.

몇분이 지났지만 전동차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불이 난 옆 차량(1079호)에서 유리창 깨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언니에게 "지금 지하철에 불이 났다"며 화재 사실을 알렸다. 이 때가 9시58분. 승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기관실(운전실)로 가자"고 해 따라 나섰다. 그러다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연기가 심하게 들어오며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관실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기관사가 문을 열었다. 기관실에는 연기가 좀 심하지 않을 것 같아 1호 객차와 연결된 문을 통해 들어갔다. 기관실에는 나를 포함해 20대 여성.어린이 등 모두 6명이 모여 있었다.

"아저씨 빨리 출발합시다"라고 재촉하자 기관사 崔씨는 "차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도 미치겠습니다"라며 안절부절 못했다.

기관사는 계속 종합상황실과 다급하게 통화를 했다.

"어떻게 조치를 해 주십시오. 뒤로 빼면 안되겠습니까" "엉망입니다"라며 종합사령실에 대책을 요구했다.

연기가 짙어지면서 숨 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승강장 구내는 비명소리로 뒤덮였다.

기관사가 역무실에 도움을 청하려는 듯 운전실 문을 열고 승강장으로 나갔지만 몇 걸음도 못가 돌아왔다.

崔씨는 "연기가 너무 꽉 차 안되겠다"며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뒤로 빼면 안되겠습니까. 이 소리가 안들립니까. 119를 보내주십시오. "

그러다 포기한 듯 이들에게 "나갑시다"라며 랜턴을 챙겨 오른쪽 기관실 문을 밀었다. 崔기관사는 그러나 곧바로 기관실을 나가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이영희씨는 "경황이 없어서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과 같이 기관실에 있다가 탈출한 임은희(30)씨는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했다.

"기관사가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전원키를 뽑더니 문을 열고 나가더라고요. "

일행 6명은 崔씨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다음은 이영희씨의 계속되는 증언. 기관사가 랜턴으로 앞을 비췄지만 연기가 너무 차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기관사의 옷깃을 잡고 함께 벽을 더듬어 경상감영공원 쪽 출구로 빠져 나왔다. 이 때가 오전 10시8분이었다. 탈출에 2~3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한편 임씨는 탈출에 앞서 崔씨가 "승객 여러분…"하는 안내 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다만 "무슨 내용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마 대피를 권유하는 방송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대피방송과 함께 崔씨는 객실의 출입문을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간 부근의 객실에 있다가 문이 열리는 틈을 이용해 빠져나온 권경덕(25)씨는 "아마 10시쯤이었던 것 같다. 방송 후 문이 열려 일부 승객과 함께 탈출했다"고 말했다.

崔씨는 경찰에서 "승객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안내 방송을 하고 객차 문도 열었다"며 "승객들이 모두 대피한 것으로 판단하고 키를 빼 탈출했다"고 진술했다. 崔씨가 빠져나오면서 키를 뽑는 순간 전동차의 출입문이 모두 닫혀 안에 있던 승객들은 꼼짝 못하고 죽음을 당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한다. 객차 안에 갇힌 승객들은 가족 등에게 휴대전화를 하며 구조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별취재팀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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