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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려움 여러 형태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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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삶의 어려움은 오래 전부터 소설의 주제가 되어왔다. 삶의 내용에 따라 그 질과 폭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식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때로는 정치적 현실로도 나타나고, 기능사회에 있어서 개인의 위축으로도 나타나고, 존재의 유한성으로도 나타나며, 의식의 단절로도 나타난다. 작가는 말하자면 이러한 어려움의 상황속에서 사회적 모순과 인간적 갈등을 드러냄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의 재현이라는 저 고전적 임무를 수행하고있다.
최인훈씨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창작과 비평)은, 어느 봄날 창경원에 들어간 주인공이 동물원과 식물원 구경을 하고 나온 이야기다. 연작소설의 두번째 것인 이 소설은, 주인공의 구경 그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대상의 표정과 행동속에 자기모방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어려움을 말하는 작가의 괴로움을 담고 있다. 백치와 교활의 표리관계가 어떤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혹은 현대인의 본질적 맹점일는지도 모른다는 이 작가의 의식은,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직절적인 방법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과 의심과 복수가 서로 손을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 서로가 서로의 발뒤꿈치를 밟고 있기때문에 모두가 모두에 대해 미안한 그런 탑돌이]를 하고 있는 세계로부터 벗어나면서 주인공은 마치 [새벽에 매음굴을 빠져나가는 오입징이처럼]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이 부끄러움의 자각증과 무서움의 공포증속에 삶의 어려움이 존재하며 여기에서 이 작가의 내면의 고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잡지사 기자의 범속한 생활을 그리고 있는 김문수씨의 미로학습』(이대문학)과, 거대한 동체와 계집애목소리를 가진 한 군인의 이야기인 조해일씨의 『멘드롱따또』(월간중앙)는 최인훈씨의 그것과는 달리, 조직사회속에서 무력화해 가는 삶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생사의 여부를 확인받은 것으로부터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는 『미로학습』은 매일 겪는 연탄개스의 위험, 만원버스 승차, 성실이라는 거울문자 밑에서의 근무, 공휴일 부재의 출근등 일상생활의 반복을 통하여 나의 왜소화가 주는 기계적 삶의 우스꽝스러움을 드러내준다. 반면에 『멘드롱따또』는 다른 사람보다 몸집이 엄청나게 크다는 데서부터 고참병들의 미움을 받고, 그로 인하여 과실치사의 오명을 쓰고, 소매치기라는 오해도 받고, 일종사역도 도맡아한다.
이 모든 일들이 그의 착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에게 있어서 삶의 어려움이 되고있다. 그가 아무리 주어진 삶에 충실하려해도, 몸집이 크다는 이유로 해서 현실의 끊임없는 간섭을 받게되고, 모든 현실과 화해적 결말에 도달하게되자 그는 죽고만다. 그의 삶과 죽음이 갖고있는 우스꽝스러움은 상황의 경직에서 야기된 개인의 비극인 것이다.
이 두 작품이 주제의 평범성과 센티멘털리즘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가 범속한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하나가 비범한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어러움이 어떤 것인지 동시에 보여주는데 있다. 그것은 조직사회에서 기능화하고있는 개인의 비극에 대한 표상에 다름아니다.
오정희씨의 『산조』(월간중앙)는 전통적인 꼭둑각시 놀음을 보존해오고 있는 한 장인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조건이 성립되었을 때, 즉 사용되어 질 때만 생명을 갖는]탈은 제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자진가락]을 필요로 하고, 그런속에서 그것은 관객들에게 광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유물보존이라는 이유에 의해 그것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기때문에, 꼭둑각시를 움직이는 장인의 존재이유가 악화되고있다.
이것은 곧 장인적 삶에서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장인의 숙명이 과거의 슬픈 기억과 한 가락이 됨으로써 훨씬 심화된 아픔으로 나타난다.
이상의 작가들이 삶의 어려움을 드러내 주고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의식이 상황에 대해서 정직한 반응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작가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라고까지 요구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괴로움을 개인의 것으로부터 공동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이야기할 수 있고 얼마나 심화할 수 있었느냐에 있다. 이런 점에서라면 이 달의 많은 작품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나는 고백할 수 있다. [김치수(문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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