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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25 20주 3천년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29)|금은의 반출(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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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은반출의 직접 관계책임자는 구용서 한은총재,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대령, 보병사령관 송요찬대령의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꼭 20년전의 옛 일이어서 그런지 세 사람의 증언이 큰 줄거리는 다 같지만 세세한 면에 들어가서는 조금씩 다르다.
이 점을 참작하면서, 헌병 1개소대 병력을 이끌고 직접 금은수송경호를 맡았던 송요찬대령(현인천제철사장·53)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7일에 육본에 들려 전황을 알아보니 사태가 심각해서 다시 헌병대로 돌아가다가 마침 한은앞에 이르렀을때 이 은행에 중요물자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구총재방으로 올라가서 대피시킬 것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태평하게 있다가 사태가 급하냐고 반문해요. 마침 김일환대령도 지폐를 후송하기위해 구총재방에 와있었습니다. 『혹시 금같은 것 있지않느냐』고 되묻자, 구총재도 사태가 다급한 것을 깨닫고 지하실로 안내하더군요. 거기 가보니 가로와 세로가 1평방m쯤 되는 상자가 죽 놓여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모두 98개인 것 같아요.

<무거워 트럭 스프링 휘어>
구총재는 이것을 후송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심각한 표정을 집데다. 헌병과 트럭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사령부로 돌아와 홍구표대위를 대장으로 1개소대 병력과 징발한 트럭 2대를 보냈지요. 홍대위에 한은에 가서 가마니에다 금괴를 싣고 대기하고있다가 명령있는대로 후송하라고 지시했읍니다. 가마니에 싼 금괴를 실은 트럭을 김일환국장이 싣고온 지폐 수송차와 함께 육본에서 시흥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금괴가 하도 무거워서 트럭의 스프링이 휘어버려 트럭을 한 두대 증차해서 나누어 실었지요. 내가 수송한차는 전부 금이지 은은 없었어요. 구총재가 은까지 있다고 말해주었으면 그것마저 수송했을텐데 분하게도 은은 못 실어 냈고, 그놈들이 다 가져가 버리지 않았어요."

<한은 실무자는 은반출 시인>
송요찬씨의 증언중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은은 후송치못해 적 수중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용서총재와 당시의 한은 조사부장 장기영씨는 틀림없이 4t의 금은을 다 후송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한은 실무자들 증언이 옳은 것 같다.
한편 적침직후인 6월26일과 27일 이틀동안 은행가를 휩쓴 예금인출 소동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본 연재 제12회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국방부 보도과의 낙관적인 전황발표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위기감은 재빨리 시장과 은행가에 나타났다. 시장의 쌀을 비롯한 식료품이 바닥났고, 은행앞에는 예금을 인출하려는 인파가 쇄도하였다.
당시 중견 샐러리맨의 월급이 평균 l만2천원정도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있었는데 한가마에 2천3백원하던 쌀값이 26일 하오에는 두 배 이상으로 폭등했다. 그 값을 주어도 없었다.

<10만원으로 인출액제한>
난리가 나면 현금이 필요한 것은 고금동서가 다 마찬가지인데 6·25에도 지금 돈으로 6천7백만원의 예금을 찾으려고 시민은 아우성이었다. 이때의 현상을 관계자로부터 들어보자.
▲송인상씨(당시 재무부이재국장·현 한국경제개발협회 회장·56)『25일은 일요일이고, 26일이 되니까 각 은행에는 예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은행은 뇌취상태에 빠졌어요. 처음에는 한은에 대해 시중은행에 대한 충분한 지원을 약속했으나 걷잡을 수 없게되어 예금인출액을 제한하기 시작, 1인당 10만원(당시돈)으로 선을 그었지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27일상오 10시쯤에 은행과장인 이치령씨가 공무원들이 월급은 탔으나(주=20일이 봉급일)모두 썼을 터이니, 그냥 피난가면 곤란하지않겠느냐고하여, 즉시, 내가 주관해서 국장회의를 열어읍니다.

<이재국장 재량으로 봉급선불>
강성태 세관국장, 박희현 회계국장, 인태식 사세국장등과 상의하여 전공무원에게 2개월분의 봉급을 주기로하고 중앙은행에대해 국고금에서 이를 지출토록 지시했읍니다. 또 은행 전직원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해 거의 모든 행원이 혜택을 입었으나 다른 공무원들은 이미 이때는 지휘계통이 잘 안서서 못 받은 사람도 많았지요. 이 조치는 이재국장으로서는 분명히 월권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봉급 선불이 안됐다면 더 고생을 했을 터이니까요』
▲구용서씨(당시한은총재·72) 5일하오 4시에 간부를 비상소집해 의회를 열었는데 이때 참석한 사람은 허민수 수석부총재, 임송본 부총재, 나정호 이사(작고), 장기영 조사부장, 안명환 감독부장, 박승준 부장, 김영찬 외국부장, 오정환 발권국장이었지요. 26일에 은행문을 열면 예금인출이 많을 것 같아 발권과 출납에 사전준비를 잘시키고 금융계가 동요않도록 일러두었지요.
26일 10시에 경제관계 각부처 장관과 금융인들 및 미국인 고문들과 연석회의를 열었을때, 재무장관에게 예금인출 증가를위해 시중은행에 긴급 융자를 건의, 나에게 재량권을 달라고 했으나 하루 더 참아보자는 거예요.
27일 아침에 시내를 한바퀴도니까, 은행에 시민이 장사진을 치고있어 최재무를 만났더니, 예금지불을 제한하라는 겁니다. 나는 평상대로 은행일을 최선을 다해 계속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결국 27일에 금융기관 예금지불제한에 관한 대통령긴급조치령 제2호가 나왔습니다. 이 조치는 최장관이 만들어놓고, 피난나간 것입니다.

<예금지불제한에 이의도>
나로서는 해야할 또 하나외 큰일이 있었어요. 외국은행에 예치한 한은예금 처리가 급하다싶어 26일밤 9시께 동경지점장 천병규씨에 전화하여 우선 예금을 인출할 수 없도록 각 외국은행에 서명권을 취소하는 통지를 내도록 지시했지요.
즉 나와 부총재, 부장, 국장, 대리등은 당시 각 외국은행에 예치되어있는 2천만불의 예금을 인출할 수 있는 서명권자로 서명권이 각 외국은행에 통보돼있었던 것인데 만약 이중 한사람이라도 적에잡혀 강제서명을 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27일아침 9시쯤 다시 동경지점에 전화하여 동경주재 부총재인 김진형씨에게 외국은행예금 관계의 책임을 일임했읍니다.』

<맥아더에 신권인쇄부탁>
구총재가 그 혼란중에도 재빠르게 취한 조치로서는 국방부의 예금인출을 재촉하여 각 군에 영달케 한 것과 은행권 부족을 예견, 맥아더 사령부에 신권인쇄를 요청한 것등을 들수 있겠다.
구총재가 금은을 실은 트럭과 함께 27일하오 3시쯤에 서울을 떠난후 한은의 마지막 엑소더스 귀임자였던 조사부장 장기영(현한국일보사장·54)의 증언은 드릴에 넘쳐있다.
우선 말해둘 것은 금은반출에는 구총재께서 제일 고심하고 애썼다는 거요. 그본이 다 한거나 다름없지. 구총제가 27일하오 3시에 나간후 내가 문상철·신병언·김봉은, 이렇게 3명의 행원과 수위 몇 명을 데리고 남았지요. 그전에 다른 행원들에게는 3개월분 월급을 주고 일장훈시를 한다음 빨리 피난하라고 했어요.
행원들이 두 서너명씩 풀이 죽어 나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알다시피 은행은 전쟁이나서 후퇴할 때에는 현찰을 태워버리거나 적을 보고 대항할 수 없을 때까지는 남아있어야지, 그렇지않으면 처벌을 받아요.
8시쯤 김일환대령이 국방부 돈을 타러왔는데 초면이어서 신분을 확인하고 나딴에는 잘 싸우라고 격려까지하면서 트럭에 실은 채로 내주었어요.

<수위장 적탱크보고 기절>
밤 12시쯤해서 옥상에서 파수를 보던 수위장이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오다가 나동그라 기절을 했어요.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하니 탱크가 온… 하면서 말을 잘못해요. 급히 옥상에 올라가보니 분명히 탱크소리는 들리는데 아직 거리가 멀어요.
나는 8·l5해방때 함북청진 조선은행에 있어서 소련군이 8월10일에 청진에 상륙하는 것을 직접 보았거든. 그때, 북괴가 바로 6·25때 가지고 나온 T-34 소련탱크도 보았고. 1시쯤 넘으니까 적탱크가 지금 신세계의 퇴계로쪽에서 남산에다 대고 포를 포는 것이 보여. 충무로에서는 다발 총소리가 요란하고….
이제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1시15분쯤에 잔류직원에 후퇴명령을 내렸지요. 뒷문으로 나오는데 수위가 막는단 말이야. 이자는 좌익인데 아마 지금도 안양교도소에 있을거요. 수의를 뿌리치고, 세단과 드리쿼터에 분승, 소공동으로해서 빠져나갔는데 한장다리는 폭파 7분전에 건넜소.
노량진과 영등포 전차길을 고치느라고 파논 진흙길을 달리는데 펑 소리를 들었으니까. 그길로 시흥에있는 채병덕사령부로 가서 금은의 행방을 물었더니, 27일하오 4시반께 구총재가 두 트럭에 싣고 통과했다는 거예요. 마음이 놓이더군.

<금은 철수소식듣고 안심>
그 다음에 한은부장이상의 중역들이 모여있기로 돼있는 안양의 윤인상씨 별장으로 갔어요. 박승준인사부장이 나를 보더니 얼굴이 파랗게 질려요. 최후 철수책임자인 내가 나왔으니, 서울이 적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안 거지요.』
재무부나 한은이 적침을 맞아 취한 조치에 대해서는 공과가 엇갈리지만 과보다는 공이 더 컸다는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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