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여는 법 알면 17초, 모르면 116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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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56초.

건국대생 김지현(20.토목환경공학부)군이 서울 지하철 전동차의 출입문을 수작동으로 열고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20일 낮 본지 취재팀은 일반인들의 '전동차 탈출 실험'을 했다.

화재로 인한 정전 때문에 문이 안 열려 초(超)대형 참사를 빚은 대구 지하철.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쳤을 때 시민들의 대처능력을 직접 점검하고 보완책을 강구해 보기 위해서였다.

장소는 서울 성동구 용답동 지하철공사 군자 차량기지. 서울지하철공사 측 협조를 받았다.

金군의 탈출 시간은 대구의 1080호 전동차 승객들이 화재를 감지해 전화로 구조를 요청하고부터 화염에 휩싸일 때까지(57초)의 두배다.

金군은 "나도 거기에 있었다면 영락없이 죽었겠다"고 했다.

같이 참가한 김주호(34.회사원)씨는 20초, 이연임(58.주부)씨는 17초가 걸렸다. 두 사람이 金군과 다른 점은 "평소 비상작동법을 눈여겨 봐두었다"는 것.

최소한 수동 개폐장치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기에 설명서를 따라 장치를 작동하기만 하면 됐다. '평상시의 대비'는 이렇게 중요했다.

그럼에도 金씨와 李씨는 "실제상황이었다면 우왕좌왕하느라 침착하게 문을 열고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참사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

◇극명히 대비된 탈출 능력=1번 객차에 타 신문을 읽고 있던 金군은 가상의 화재에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두리번거리다 간신히 경로석 밑에서 소화기를 찾아냈다. 고교 때 교련 수업 시간에 사용법을 익혀 소화기 작동은 가능했다. 金군은 이어 출입문으로 달려가 탈출을 시도했다. 아무리 밀치고 두들기고 당겨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출입문과 광고판 사이에 붙어 있는 안내문에는 '문 아래쪽 밸브를 열어 바람을 뺀 뒤 문을 열라'는 요령이 적혀 있다. 그러나 당황한 金군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가로 12, 세로 16㎝의 안내문이 울긋불긋한 광고들에 포위돼 눈에 안 띄었던 것이다.

金군은 발길질과 휴대전화로 차창 유리를 깨려 했다. 그러나 두꺼운 안전유리는 금도 가지 않았다. 수동 개폐장치가 있다는 취재팀의 설명을 듣고서야 金군은 안내문을 읽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작동을 했다.

2번 객차에 앉아 있던 김주호씨는 금방 소화기를 찾아냈다. 평소 소화기 위치를 봐두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화기를 작동하기까지 12초. 이어 손으로 문을 열고 나오는 데 20초. 총 소요시간은 32초였다.

세번째 객차의 이연임씨는 소화기는 쉽게 찾았지만 작동법을 몰랐다. "한번만 해봤더라도…. 글씨가 너무 작아 읽을 수가 없어요. "

하지만 소화기를 포기한 李씨는 문을 어렵잖게 열고 나왔다. "안내문을 잘 읽어둔 덕분"이라고 했다.

◇대구 지하철 57초간의 상황=18일 아침 1079호 전동차가 불타고 있을 때 중앙로역에 진입해 더 큰 인명피해가 난 1080호.

그 안에서 벌어진 상황이 119와 일부 승객 사이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에 나타나 있다.

첫 신고는 9시58분46초.

"불 났습니다. 아이구 우짜노. 빨리 부탁합니다. 연기가 많이…. "(40대 여자)

10초 뒤인 9시58분56초에 30대 여성이 또 전화를 했다.

"불났습니다. 웩웩(구토소리)…앞이 안보여요. "

마지막 전화는 9시59분43초에 걸려온 20대로 추정되는 여자의 것이었다.

"여보세요. 지하철…악-. (주변 비명소리 2~3초 더 들린 뒤 끊김)"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승객들은 운명을 달리했다.

◇"평소 익히고 침착하게 대응"=결론은 명백했다. 비상시 대처요령을 평소에 익혀둘 것, 그리고 사고시 당황하지 말 것이다.

서울지하철공사 검수팀 정명묵 주임은 "평소 문 여는 요령과 소화기 사용법을 잘 숙지하고 침착하면 위기대처를 잘 할 수 있다"며 "객차에 비치된 안내문을 잘 읽어둘 것"을 당부했다.

실험을 지켜본 지하철노조 조동희 정책실장은 "쉬운 일인데도 평소 무심하다 보면 어렵게 느껴진다. 자기 생명을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꼭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지진 피해 때문에 재난 대처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일본 사람들은 어떨까. 한국의 참사 소식에 와타나베 가즈유키(渡邊和之.25.회사원.지바현 거주)는 20일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안전교육을 받아 지하철 탈출 요령이 머릿속에 정리돼 있다"며 "손으로 문을 여는 일은 일본 사람 누구나 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창희.이철재 기자,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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