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없는 반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현대의 한국인들은 평균 28세의 남자와 24세의 여자가 서로 만나 결혼한다.
현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남자 61세, 여자 68세로 잡고 있으니 「백년해로」의 맹세로 첫발을 디디는 모든 부부들은 실상 30년 조금 넘는 세월만을 함께 살 수 있는 셈이다.
부부는 함께 있는 30연 동안 백년에 못지 않은 많은 것을 이른다. 자녀를 낳아 인류의 혈통을 잊고, 많은 종류의 사람을 체험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꿈을 구현한다. 한국의 경우 이 모든 것을 같이 이루어 가는 동반자의 관계는 부부유별이니 부창부수니 하는 남존여비의 사상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해방 후 여권 신장의 급격한 풍조가 싹트고 여성에 대한 고등 교육의 문호가 활짝 열리면서 일방적으로 순종하며 받들던 부부 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활발하게 진행된 가족 계획의 보급은 아이들 뒷바라지에 일생을 매어 온 여성들을 해방시켜 한 인간으로서의 개안을 촉진했고 모든 권위와 결정권을 가장이 몰아쉬고 있던 대가족 제도는 소가족 제도로 분화, 가정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주부의 발언권을 높이는데 공헌했다.
사회학자 이효재 교수 (이대) 가 59년에 조사한 「서울시 가족의 사회학적 고찰」중 부부관계에 관한 것을 보면 생활비를 아내가 모두 관리하는 가정이 66·4%, 일부만 관리하는 가정이 25·6%로 92%의 주부가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의 사업에 대해서 같이 의논하는 주부가 89·2%에 이르고 있으며 54·2%가 남편과 함께 자주 또는 가끔 극장·친지 방문·장보기·들놀이·외식 등을 위해 외출하고 있다.
10년 후인 69년 역시 서울의 중류 가정을 상대로 이 교수가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55·5%가 부부 동반으로 방문을, 39·3%가 함께 들놀이를, 그리고 47·7%가 함께 영화나 음악회에 감으로써 다양한 동반 외출을 즐기고 있다.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만족도 역시 59년 조사 때 『극히 만족하다』 17·6%이던 것이 69년에는 『대단히 만족하다』 32·8%로 크게 증가했다. 69년 조사에 응한 주부들 중 49·7%는 자신의 남편이 가정 생활에 『아주 충실하다』고 칭찬하고 있고 45·3%는 『보통』이라고 대답, 충실하지 못한 남편은 5% 미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얼른 보기에 한국의 부부중 반 이상은 행복스런 궤도를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불행한 부부 관계는 많이 해소되어 있다. 그러나 56%에 이르는 주부들이 『만족하지도 불만족하지도 않다』고 덤덤한 대답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들 모두의 인생 자체가 그렇게 덤덤하기 때문이다. 이 교수가 조사 도중 아파트에서 만난 영문과 출신의 젊은 주부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 전엔 직장에 다녔지만 남편이 원하는 대로 집에 들어앉고 보니 너무 너무 시간이 남아요. 신혼 초엔 텔리비젼에서 요리 만들기 시간을 열심히 봤지만, 이젠 싫증이 났고, 학교 때 읽던 원서들을 꺼내 공부하려고 해도 혼자선 잘 안되고, 뜨게질도 배워 열심히 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해요. 특히 남편의 귀가 시간이 며칠 늦어지면 지쳐 늘어지고, 어떤 땐 크게 소리 지르며 혼자 신경질을 푸는 때도 있어요. 이젠 아기 낳을 날이나 기다리는게 유일한 낙이죠.』
69년 조사에서 「가정 생활에 대한」부부 사이의 대화가 『충분하다』는 대답은 64·5%, 6·8%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부부 관계는 서로에게서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발굴해 내는 작업으로서만 늘 싱싱할 수 있으며 그 발굴의 수단이 대화이기 때문이다. <장명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