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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해방에서 환국 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동경에 가서 처음으로 영친왕을 뵈었을 때 전기 「윤 대비와 피치박사」의 이야기를 하였더니 영친왕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그럴 거야, 그럴 거야, 대비마마 같으면 그렇게 하실 거야』라고 하면서 어찌 좋아하는지 몰랐다. 평소에 말이 없고 항상 우울하기 만한 영친왕으로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밝은 표정이었다. 그만큼 영친왕은 누구보다도 황후로서의 윤 대비를 잘 이해하고 또 존경하는 듯 하였다.
영친왕이 가장 염려하는 분 중의 또 한 분인 덕혜 옹주는 고종황제의 고명따님으로 영친왕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인 것이다.
덕혜 옹주는 양 귀인의 소생인데 고종은 늦게 얻은 이 따님을 몹시 사랑하여 장중보옥과 같이 쥐면 꺼질까, 불면 날까해서 애지중지 하였다. 그리하여 옹주의 나이 7살이 되자 덕수궁내 준명당에다 유치원을 특설하고 당시 귀족의 딸 7명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공주로서의 훌륭한 교육을 받게 하였었다. 교사로는 한국인과 일본인 보모가 한사람씩 있었는데 고종은 또 옹주가 유치원에 갈 때는 가까운 거리이건만 꼭 유모 변씨를 달려서 사인교를 타고 가게 했다.
소학사(지금의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마차를 타고 통학했으며 봄철의 꽃놀이와 가을철의 단풍놀이에는 부왕을 따라 비원에서 갖은 재롱을 다 부렸었다.
그러나 그때의 고종에게는 크나큰 걱정이 하나있었으니 그것은 일제가 영친왕을 볼모로 일본으로 데려간 전례가 있는 만큼 덕혜 옹주에 대해서도 거저 내버려둘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본의 역사를 보면 정략결혼은 그들의 장기중의 장기이므로 덕혜 옹주도 성장하면 반드시 일본으로 데려다가 정략결혼을 시킬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므로 고종황제는 밤에 잠도 잘 자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황제를 모시고있던 시종 김황진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자식이 몇이나 있느냐?』
『소인에게는 딸자식이 하나 있을 뿐이옵니다.』
『그러면 조카는 없느냐?』
『아우가 여럿 있어서 조카아이들은 많사옵니다.』
며칠 후 고종은 다시 김 시종을 보고 『일본 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옹주는 이편에서 먼저 약혼을 해두었다가 적당한 시기에 발표하여 그놈들이 꼼짝 못하도록 해야겠다』고 하시면서 누군가 장래 부마(임금의 사위)감으로 조카를 하나 내놓으라고 하였다.
시종 김황진은 병자호란 때 농성중인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항복에 반대하다가 소위 척화신의 대표격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서 7년 동안이나 심양(지금의 봉천)에서 유폐생활을 한 청음 김상헌선생의 후예로 수많은 시종 중에서도 고종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모처럼의 분부일뿐더러 황제의 고충을 가엽게 생각한 김 시종은 덕혜 옹주와 나이가 알맞는 조카아이를 하나 천거하였다.
그래서 고종은 어느날 밤 비밀히 별감(대궐에서 일보는 사람)을 시켜서 그 아이를 덕수궁으로 데려다 보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고종과 김 시종 사이에는 조카아이를 김 시종의 양자로 한 후에 약혼을 하기로 밀약이 성립되어 고종이 적당한 시기에 덕혜 옹주는 이미 약혼이 되었음을 미리 공포하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대궐 속에도 수많은 사람이 살고있고 그 중에는 일본측의 앞잡이도 있었으므로 그만한 일이나마 비밀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옹주의 약혼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었지만 고종이 김 시종과 이야기를 할 때에는 남의 이목을 피해서 되도록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아무래도 비밀히 담화를 할 수가 없을 때에는 조그만 종이 쪽지에 사연을 써 가지고 있다가, 혹은 방바닥에 슬쩍 떨어뜨리기도 하고, 또 혹은 보료 밑에 넌지시 넣기도 하여 남몰래 그것을 꺼내보았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있다.
그후 김 시종이 어느 날 덕수궁으로 출근을 하려고 인력거를 타고 대한문을 들어가다가 일본헌병에게 제지를 당하고, 경무 총감부로 연행된 후 다시는 덕수궁에 들어가지를 못하였는데 그것은 내용은 잘 몰라도 고종황제와 김 시종 사이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다는 밀정의 보고로 경무 총감이 직접 김 시종에게 권고사직을 강요한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고종과 김 시종」은 다시는 만나지를 못하고 덕수궁의 긴 담장을 사이에 두고 군신이 서로 그리워만 하다가 1919년 삼·일 운동직전에 고종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마니 김 시종은 다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땅을 치고 울뿐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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