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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패전 직후의 일본사람의 생활이란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공습으로 도시라는 도시는 모두 잿더미가 된데다가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으니 당시 9천만에 가까운 일본국민도 꼭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인플레」가 우심 해서 화폐 가치가 떨어져 모든 물가가 폭등하니, 거리에는 대낮부터「팡팡걸」(양갈보)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히비야」(일비곡)큰 앞길에 있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앞에는 날마다 공산당원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서『「맥아더」원수여…우리에게 식량을 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한 판국이니 영친왕인들 얼마나 괴로 왔으랴? 그러나 식구래야 이은씨 내외분과 당시 학습원중 등과 생이던 아들 구씨까지 넣어서 모두 세 사람뿐이므로 먹는 것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없었으나 그 보다도 아내의 나라인 일본은 패전으로 몰락하고 남편의 나라인「조선」은 해방이 되었다는 엄숙한 사실 앞에 자기들의 운명을 장차 어떻게 개척해 나갈까가 더 큰 적정이었다. 그 점은 어린 아들 구씨도 마찬가지였으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의 패전을 슬퍼해야 할지, 아버지의 나라「조선」의 해방을 기뻐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는 그대로 또한 깊은 오뇌와 번민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영친왕 저를 방문하였을 때에는 그 큰 저택의 쇠창살로 만든 정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문패에는 참의원 의장관이라고 쓰여 있어서 좀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나중에 들으니 그것은 패전직전까지 주로 대사를 지냈고 당시는 참의원 의장으로 있던「사또오」 (좌등상무)씨가 조금이라도 영친왕 일가의 생활을 돕고자 보통 때에는 별로 쓰지도 않는 「참의원 의장공관」으로 일부러 빌어서 매월 삭월세로 30만원씩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패전 직후의 일본은 세금이 몹시 많아서 30만원을 받는대야 실수입은 그 반액인 15만원 밖에 되지를 않았으나 물자가 귀하고 돈이 없던 당시로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내가 영친왕을 만난 것은 본 채가 아니요 그 뒤에 있는 전에 운전사가 거주했다는 조그만 목조 건물이었는데 세상일이란 모두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니 그 같이 고립무원하고 살기가 어려운 영친왕이건만 일본에 진주해온「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웬일인지 영친왕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최고사령관「맥아더」원수가 부관을 시켜서 위문도 하고 그 때로는 얻기 어려운 생활 물자를 보내는 등 가지가지의 호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안일이지만,「맥아더」원수의 부친「맥아더」장군 1세(소장)는 일로 전쟁 당시의 육군소좌(소령)로서 관전무관이 되어 압록강변에 진을 치고있던 일본 군대에 종군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서울에서 고종황제를 뵈었을 때 황제로부터 고려자기로 만든 와병하나를 기념으로 하사 받은 일이 있었는데 아들 되는 원수가 그것을 물려 받아 오랫동안 보존하여 오다가 태평양 전쟁당시「필리핀」에서 탈출할 때에 그만 분실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같이「맥아더」원수는 부자양대에 걸쳐서 우리 한국과는 우연치 않은 인연이 있음을 잘 알 수 있는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화병을 대신 하나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었다. 그래서 영친왕을 뵈었을 때『부왕께서 화병을 하사하신 일이 있으니 이번에는 아드님인 전하께서 화병을 다시 하나 선사한다면「맥아더」원수도 매우 기뻐할 것이고 또 6·25 동란 때 우리 민족과 나라를 구해준 은혜를 갚는 것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원체 총명한 분이라 영친왕도 나의 뜻하는 바를 잘 알아차리고 선뜻 쾌락 하였다.
수일 후 얼마 안 되는 물품 중에서 이조자기의 화병 하나를 골라서 보냈더니 곧 이어서 부관으로부터 서한이 왔는데 거기에는「맥아더」원수가 매우 만족하였다는 것과「원수」는 가까운 장래에 영친왕과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노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미구해서「맥아더」원수가 만주 폭격문제로「트루먼」대통령과 의견이 맞지 않아「유엔」군 총사령관을 파면 당하고 즉시 동경을 떠나게된 때문에 그 일은 영원히 실현이 되지 못했으나 한국의 구 왕실과「맥아더」일가와의 부자 양대에 펼친 깊은 인연과 아름다운 이야기는 두고두고 세상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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