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위해 민족주의를 버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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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역사학자인 윤해동(44.서울대 강사)씨가 단행본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刊)를 통해 역사학계의 식민시대 인식과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간 안병직(서울대).임지현(한양대)교수 등 서양사를 전공하는 일부 교수들이 국가.민족 등이 근대적 관념의 산물일 뿐이라는 인식에 근거해 민족주의를 비판해 왔지만 이번처럼 한국사 전공의 연구자가 민족주의 비판에 나서기는 처음이다.

특히 필자가 진보적 역사 연구를 표방하며 1980년대 중반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소장 서중석)에서 활동해왔던 연구원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된다.

이번 저술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회색지대'논리다. 요컨대 그것은 식민지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으로 그간 '저항/친일이라는 이원론으로 화석화한 현재의 근대사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 마련된 반성적 지평이다.

'회색지대'란 식민 사회의 지배/피지배라는 대립구도를 넘어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 근대화 속에 나타난 야만과 비인간성의 영역에 주목한 개념이다.

윤 연구원의 경우 식민지 주민의 '비인간화'와 제국주의 범죄를 재조명한다. 이에 그는 '회색지대'의 거울을 통해 근대문명을 반성하는 것은 물론 식민시대 인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필자는 '민족주의가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다'(내파:內破)며 이런 의문을 던지고 있다. "민족국가라는 정치 단위는 근대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가. 지구화 시대 민족주의 자체가 상대화하는 것은 아닌가." 이는 사실상 민족주의가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는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조동걸 전 국민대 교수 등 민족사학의 1세대 선배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을 들이밀고 있다.

필자는 그들에게 "동일화 이데올로기를 변형함으로써 민족주의 사관을 강화하려 하지만, 결국 그 논리는 와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힐난했다.

하지만 지배/피지배라는 대립항을 버리고 근대문명의 야만이라는 '회색지대'를 통해 추상적으로 접근할 때 역사의 구체성은 흔들릴 수 있다.

필자 스스로 서문에서 '구세계의 익숙한 무기와 결별하는 것이 새로운 무기를 벼리는 것일지, 아니면 스스로를 죽이는 칼이 될 것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고 실토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남들보다 늦게 이 분야 공부에 뛰어든 윤 연구원은 "역사연구를 본격 시작하면서 '한국사를 과연 학문이라 할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며, "전공자들이 잘 읽지 않은 책을 통해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간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전혀 반응이 없었던 점을 지적하며 "한국 사학계의 무관심 그 자체가 오히려 문제"라고 진단을 내리고 있다.

필자는 이번 책에서 자신의 '아버지 민족사학'에 칼끝을 겨눈 셈이다. 그 결과 그가 한국 사학계에서 설 땅이 위태롭게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정말 민족주의가 자신있으면 논쟁에 나서라"고 도발적인 주문을 하고 있다. 한국 사학계의 반응이 주목된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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