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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인내로 이긴 기구한 인연|방자여사가 말하는 결혼생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일본 이본궁가의 왕녀였던 방자여사는 1920년 4월28일 나라 잃은 조선의 황태자 이은공의 비가 됨으로써 기구한 내조의 길에 올랐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은 그들 자신은 물론 주위의 누구에게서도 결코 축복 받을만한 인연이 아니었다. 한-일 두 나라의 인연과 역사의 압력이 악몽처럼 내리 누르는 속에서 그들이 하나의 남자와 여자로 맑게 사랑할 수 있었던 것만이 유일한 다행이었고, 그 비운 속의 부부애야말로 이들이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아홉살 소녀였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등불의 행렬이 지나가는 축제를 보았습니다.
유모에게 물어보니 조선을 통합해서 영토를 올린 기쁨을 축하하는 잔치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후 조선 황태자의 비가 되면서 나는 그날 저녁에 본 등불 행렬을 생각했습니다.』
방자여사가 쓴 회고의 글은 이렇게 담담하게 떨쳐진다. 그 축제의 뒤쪽에서 망국의 황태자 영친왕은 일본 황실의 학습원에 유학와 있었다.
11살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 일본에 건너온 후 갖은 아픔을 홀로 견디며 자란 이은공은 방자여사와 결혼할 무렵 이미「웃지 않는 황태자」가 되어 있었다.『그 분은 무슨 일이 일어나건, 기쁘건 슬프건 내색하는 법이 없었으나 내가 처음 한복을 입었을 때는「아름답다」고 칭찬을 해주셨고 나는 그후 전하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자주 한복을 입곤 했었지요. 육군대학에 다니실 때는 늘 숙제를 가지고 와서 하셨는데 내가 이렇게 저렇게 의견을 내면「방자는 훌륭한 참모장이 되겠군」하곤 칭찬도 하셨답니다.』
자서전은 이렇게 조용한 신혼의 행복을 들려주고 있다.
역사의 대세를 인간이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담담함은 이들 부부의 인품으로 굳어졌다. 첫 아들 진이 21년5월 서울 시댁으로의 첫 나들이에서 변사하던 날 밤 방여사의 일기도 역시 담담한 필치로 엮어져 있다.
『결혼할 때부터 위험이 신변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각오하기는 했으나 이것이 진에게 올 줄이야. 우리들의 슬픔을 아무도 알아주려 하지 않는 각박한 세상의 제1보. 이제 또 앞으로 얼마나 큰 파란이 있을지 모르나 이 아픔은 내 생애가, 끝나도록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불운한 왕실은 둘째 아들 구씨가 미국시민「줄리어」여사를 아내로 맞음으로써「가족 네 명의 혈통이 저마다 다른 기구한 가족이 되었다. 영친왕 부부는 이「기구함」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꼈으나『우리가 강요받은 결혼을 했던 만큼 아들에게 다시 강요하지는 말자』고 약속했다.
57년 영친왕은 뇌혈전증으로 앓기 시작, 숨지기까지 13년을 실어증속의 병상에서 보냈다. 63년 11월 이들 부부는「한 사람의 시민으로」한국에 돌아왔으나 그리던 조국의 땅을 한치도 자기의사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이은공은 이미 건강을 잃고 있었다.
이은공은 귀국후의 거처를 성모병원에 마련했고, 방자여사는 낙선재에서 아들 내의와 함께 지내며 그런 대로 단란한 세월을 보냈었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찬항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신박약아와 뇌성마비의 어린이들을 구호했던 방자여사는 명휘원이란 자선단체를 설립, 자행회란 이름으로 역시 정신박약아를 위해 일하고 있다. 바쁜 일과 속에서도 하루도 빼지 않고 남편의 병상을 찾아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일이 큰 기쁨이었다.
일본천황 유인이 황태자이던 시절, 그의 비로 간택되었다가『아기를 낳을 수 없을 것』 이라는 의사의 오진으로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 방자여사의 일생은 어긋났으나 아름다움까지 포기하지는 않은 일생이었다.
금혼을 살아서 함께 보내고 이틀후에 헤어진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역사의 압력을 인간의 사랑과 인내로 이긴 담담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장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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