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차 할인공세에 국산차 가격 경쟁력 ‘뚝’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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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회사원 정모씨는 요즘 15년 동안 탔던 르노삼성 SM5를 새 차로 바꾸려고 한다. 처음엔 별 고민 없이 국산 중형차를 사려고 했다. 수입차에도 눈길은 갔지만 ‘남의 일’로만 여겼다. 국산차보다 가격이 비쌀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가격을 저울질해보니 국산차와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할인행사가 열리면 수입차가 오히려 더 싸졌다. BMW 520d(6200만원)를 사면 무려 700만원이나 깎아준다. 혼다 어코드 2.4(가격 3490만원)도 198만원을 할인해주며, 도요타 캠리 2.5(3370만원)는 100만원 할인에다 일정기간 엔진오일 무상교환까지 해준다. 이렇다 보니 동급의 쏘나타·그랜저와 같은 국산차와 별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가격대가 내려간다. 그는 이제 수입차를 몰아볼까 고민 중이다.
 
가격 할인에 선택사양 추가비용 없애
‘고가’로만 여겨졌던 수입차 가격이 국산차 가격보다 내려가는 ‘가격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수입차 업체들이 공격적인 가격 할인에 나서는 것이 주된 이유다. 추가 비용 부담이 있는 선택사양(옵션)을 무상 기본 사양(standard equipment)으로 제공하는 수입차까지 있어 이 경우 국산차와의 가격 차이는 더욱 줄어들게 된다.

그 선두에는 도요타 캠리가 있다. 한국도요타는 대표 모델인 캠리 2.5의 가격(3370만원)을 5월부터 매월 300만~100만원씩 깎아주는 특별 할인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최고액인 300만원을 할인받을 때는 현대차의 2013년형 신차인 쏘나타 더 브릴리언트(3190만원·최고급 사양 터보 GDi 프리미엄 기준)보다 120만원이나 낮았다.

게다가 캠리에는 국산차의 경우 선택사양으로 추가해야 하는 내비게이션이나 선루프, 접이식 뒷좌석 등이 추가 비용 없이 기본사양으로 장착된다. 쏘나타에 이런 사양을 추가할 경우 300여만원을 더 내야 한다. 가격 차가 그만큼 더 벌어지는 것이다.
 
BMW 520d도 제네시스 BH330보다 싸
국산차와 수입차 가격 역전은 유럽 차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1600cc급 대중 모델인 현대 i30과 독일 폴크스바겐 폴로의 출고가격을 비교해보면 각각 2095만원(VGT PYL 기준)과 2490만원(TDI-R라인 기준)으로 현대차가 395만원 저렴하다. 하지만 옵션을 붙이게 되면 수입차 가격이 훨씬 낮아진다.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i30의 선택사양인 내비게이션·후방 카메라 패키지(90만원), 와이드 파노라마 선루프(85만원), 하이패스 시스템(25만원) 등을 모두 장착하면 425만원어치나 된다. 폴로보다 30만원 비싸진다.

CEO들이 많이 애용하는 BMW 520d와 현대차의 제네시스 BH330 다이내믹도 사정은 비슷하다. 제네시스 BH330 다이내믹의 출고가격은 5520만원으로 BMW 520d(6200만원)보다 680만원 싸다. 그러나 이달부터 BMW가 520d를 700만원이나 할인하기 시작하면서 제네시스가 되레 20만원이나 비싸졌다.

업계에서는 국산차와 수입차의 가격 역전 배경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우선 국산차의 고급화 추세다. 국내차 업계가 그동안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에 따라 해외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장비와 기술을 얹는 데 주력해왔다. 예컨대 가솔린 엔진의 직분사 장치, 디젤 엔진의 커먼레일 시스템, 차간거리 유지 기능을 갖춘 정속주행장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가죽 인테리어는 물론 파노라마 선루프, 유명 수입 브랜드의 오디오 시스템에 이르는 호화 옵션이 대형차는 물론 중형차까지 적용됐다. 이러다 보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수입차는 대중화 바람으로 이에 대응했다. 수입차 업계는 최근 들어 국내 시장을 빼앗기 위해 “밑져도 팔고 보자”는 식으로 가격을 낮춰 왔다. 국산차와 가장 심하게 경쟁하는 중저가 수입차들이 가죽 대신 직물로 인테리어를 하는 등 ‘가격 거품 빼기’에 나섰다.

선택사양(옵션)에 대한 양측의 입장도 가격 역전에 영향을 줬다. 과거 국산차 업계는 복수의 편의장비를 몇 개의 그룹으로 묶은 패키지 옵션 제도를 운영했다. 하지만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여론이 잇따르자 이를 없애고 각종 편의 장비를 개별적으로 선택하게 했다. 반면 수입차 업체는 옵션을 세세하게 나눠서 운영할 경우 소량 주문이 지나치게 늘어날 것을 우려해 옵션 대신 기본사양을 늘리는 정책을 취해왔다. 주문 취소분에 대한 재고 부담을 지지 않으려 했던 수입차 업체의 행보가 각종 편의장비를 기본으로 채워놓는 결과를 가져와 소비자들에게 “외제차는 출고가격 외엔 추가 비용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줬다는 것이다.

가격 역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일부 차종을 제외하면 여전히 국산차의 가격 경쟁력이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가격대를 놓고 보면 일부 차종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입차가 국산차보다 배기량이나 각종 장비에서 아직 밀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으로 가격을 놓고 벌일 양측의 ‘전쟁’에 소비자들이 어떻게 움직일지가 관건이다.

폴크스바겐코리아의 방실 부장은 “과거엔 싸고 좋은 차만 좇았기 때문에 국산차의 가격 경쟁력이 앞섰지만 지난 수년 동안 개성을 중시하는 고객이 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현대차가 ‘남녀노소 누구나 탈 수 있다’는 식으로 타깃 소비자층을 광범위하게 설정하는 바람에 차별화를 원하는 소비자층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됐고, 그 틈을 수입차가 대폭적인 가격 할인으로 파고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7월 수입차 판매 39% 증가
가격 역전으로 수입차 판매는 실제로 급증하고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7월 한 달간 팔린 수입차는 1만4953대(등록대수 기준)로 1년 전보다 38.9%나 늘었다. 올 들어 7월까지의 누적 판매량도 8만9440대로 전년 동기보다 22.5% 늘었다. 이러한 증가세에 힘입어 시장 점유율은 2009년 4.9%에서 12.3%(7월 말 기준)로 치솟았다.

현대·기아차는 이에 대해 “가격 차이가 줄고 있는 현실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다르다”는 입장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예를 들어 캠리 2.5와 쏘나타 최고급 사양인 터보 GDi프리미엄의 가격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며 “같은 가격대라도 소비자 부담 측면에서 볼 때 보험료·수리비나 애프터서비스에선 현대차가 수입차를 훨씬 앞선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차 내부에서는 최근 추세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현대차 산하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는 지난달 30일 ‘수입차 가격 하락 현황 및 영향’이란 내부 보고서에서 지난 9년간 수입차 평균 가격이 연평균 2.9%씩 떨어지고, 판매량은 7배 늘어나면서 현대차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경영학과 이남석 교수는 최근 시장 상황을 ‘제2의 모터리제이션(자동차의 대량보급)’이라고 정의했다. 이 교수는 “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국내 자동차 보급이 크게 늘어난 것을 ‘제1의 모터리제이션’이라 한다면 이젠 국산·수입차의 이분법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2단계에 접어들었다”며 “수입차에 대한 소비자의 심리적 저항선이 무너지면서 변화가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국산차의 경직된 가격체계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수입차가 시장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는 가격 정책으로 점유율을 높여 온 반면 현대·기아차는 정가제만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산차가 마케팅에서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과 저소음 등의 기존 장점을 내세우는 데만 매달리는 사이 수입차는 개성을 앞세워 국내 시장을 파고들었다”며 “현대·기아차가 수입차보다 일반적인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는 점을 감안해 지금이라도 보다 공격적인 가격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현대차 국내판매전략팀 주홍철 과장은 “최근 가격 비교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고객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며 “기존 차종은 기획단계에서 원가 계산이 끝나버려 가격 조정이 쉽지 않지만 신차를 중심으로 가격을 최대한 낮춘 ‘착한 가격’ 전략을 적용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중앙선데이 염태정 기자, 김기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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