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가 마치 야외미술관 … 설치 예술 즐기며 굿샷!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넵스 마스터피스 2013 경기가 열린 강원도 홍천 힐드로사이 컨트리클럽 15번 홀. 오승열 작가의 ‘페리페리’(왼쪽)와 ‘비빔냉면’(오른쪽)이 보인다. 13번 홀에는 ‘물냉면’이 있다. 전호성 객원사진기자

16일 오전 강원도 홍천 힐드로사이 컨트리클럽. 올해 5회째인 KLPGA 넵스(Nefs) 마스터피스 2013 대회(8월 15~18일, 총상금 6억원·우승상금 1억2000만원)가 열리고 있다. 재주 많은 낭자 골퍼들이 저마다 호쾌한 드라이브샷을 날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뭔가 색다르다. 10번 홀 코스 왼쪽으로 심어진 나무들의 버팀목마다 온통 연분홍빛 삼각형투성이다. 예쁜 종이비행기처럼, 앙증맞은 인디언 천막처럼, 짙은 초록의 대지에 선명한 분홍의 흔적을 새기고 있다. 알고 보니 이것은 이은선(35) 작가의 현대미술 작품 ‘핑크 오마주’. 원래 존재하고 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기하학적 형태를 찾아내고, 작품으로 형상화해 온 작가가 버팀목의 삼각뿔 공간감에 착안해 한 면을 분홍색 천으로 처리한 것이다. “자연에 추상화를 그린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이 작가의 설명이다.

 15번 홀로 가면 더욱 재미난 작품이 골프 선수와 갤러리를 맞는다. 잔디 위엔 냉면 그릇이 있고 그 위로 먹음직스러운 붉은색 면가락이 사람 키만큼 늘어뜨려져 있다. 서 있는 사람 입에 닿을 만한 부분에 젓가락까지 달려 있는 이 작품의 이름은 ‘비빔냉면’.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오승열(32) 작가의 작품이다. 그린으로 내려가는 카트길가에는 높이가 3m에 달하는 거대한 흰색·노란색 풍선들이 꿈틀대고 있다. 역시 오 작가의 작품 ‘페리페리(Periphery)’다. ‘덜 중요한 주변부’라는 뜻의 이 작품은 거대한 말미잘 같기도, 쌀튀밥 혹은 꽃 속의 수술 같기도 하다. 도대체 뭘 만든 것인지 명쾌하게 알기 어렵다. 일상에서 보았을 법한 이미지를 비틀거나 확장해 즐거움을 주는 오 작가의 내공이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분분한 이 작품을 만져보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면서 신기해하는 갤러리가 많다”는 것이 전시를 기획한 손하영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멀리 보이는 분홍색 삼각형들이 이은선 작가의 ‘핑크 오마주’다. 분수 아래 흰 동그라미들이 오승열 작가의 ‘올프’. 잔디 위 부서진 의자처럼 보이는 것이 이 작가의 ‘싱킹 체어’다.

3000만~5000만원 제작비 지원
이 작품들은 국내 최초로 ‘아트와 골프 경기의 결합’을 표방한 KLPGA 대회 ‘넵스 마스터피스’를 5년째 주최해 오고 있는 고급 주방가구 전문기업 넵스(Nefs)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 넵스는 2009년부터 매년 주제를 정해 작가들을 선정하고 3000만~5000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해 그들의 작품을 경기 코스에 설치해 왔다.

 제주에서 열린 첫 회 대회에는 ‘18 매스터피시즈(Masterpiceses)’라는 주제로 노준·이강훈 등 현대미술작가 18명의 작품을 코스마다 설치했다. 2010년에는 ‘모멘트 메이드 바이 그린(Moment Made by Green)’이라는 주제로 고명근·이명호 등 다섯 작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2011년에는 설치미술가 최정화의 단독쇼 ‘수퍼 네이처(Super Nature)’가, 지난해에는 공모전을 통해 선정한 양동원·오원영 등 다섯 작가의 작품이 ‘브리지 더 갭(Bridge the GAP)’이라는 주제로 각각 펼쳐졌다. 올해는 ‘터칭 그라운드(Touching Ground)’라는 주제로 오 작가와 이 작가가 각각 ‘올프(Olf)’와 ‘싱킹 체어(Thinking Chair)’ 등 모두 6종을 내놓았다.

 주방가구 회사가 왜 현대미술 작품을, 그것도 골프 경기 코스에서 선보이는 걸까. 넵스 정해상 대표는 “주방은 예술이 탄생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한다. “요리라는 게 같은 재료로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예술도 평범한 것을 모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또 골프와 아트는 변수가 많고, 항상 새로우며,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방가구를 포함해 아파트용 모든 가구를 만들고 있는 저희 회사가 예술작품을 지원함으로써 단순한 가구 회사가 아니라 디자인 회사라는 점을 알리고 있는 것이죠.”

 “골프대회를 자주 찾는 편”이라는 김대영(44·서울 강남구 삼성동)씨는 이날 “미적으로 가장 완성도 높은 대회다. 그린 위에서 미술작품을 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곳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나니 다른 대회가 드라이하게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다.

독특한 ‘작품’ 트로피 … 이색 퍼포먼스도
넵스 마스터피스의 예술적 측면은 아트 마킹볼과 우승 트로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아트 마킹볼은 참여 작가들이 골프공에 나름의 예술적 흔적을 남긴 공을 뜻한다. 두 세트를 제작해 하나는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수여하고, 다른 하나는 본사에 소장한다. 올해 이 작가는 흑과 백, 회색의 간결함을 드러낸 ‘모노 콤포지션(Mono Composition)’ 시리즈를, 오 작가는 알록달록 색상을 그려낸 ‘멜드 컬러 링즈(Melled Color Rings)’ 시리즈를 만들어냈다.

 우승 트로피를 매년 작가들이 독특하게 제작하는 것도 특이하다. 지난해에는 벽에 거는 액자 스타일로 만들었다. 올해는 오 작가가 초콜릿의 색감과 질감이 나도록 만든 작품 ‘멜트이저(Melteaser·사진)’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트로피를 금방 녹아 내릴 듯한 초콜릿의 느낌으로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넵스 이승언 마케팅팀장은 “우승자가 ‘달콤한 우승’을 만끽할 수 있도록 트로피와 똑같은 크기의 진짜 초콜릿 트로피도 같이 만들어 놓았다”며 “18일 우승자가 진짜 초콜릿 트로피로 어떤 세리머니를 펼칠지 기대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중앙선데이 정형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