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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화해 정책 아예 헌법에 못박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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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하비아리마나(60·사진) 르완다 국가통합화해위원회(NURC) 사무총장은 외과의사 출신이다. 1994년 대학살 때 살아남아 종합병원 전문의로 일하다 99년부터 르완다의 평화, 분쟁 예방, 관용·화해 운동에 뛰어들었다. 2002년 NURC 회장에 취임했으며, 2009년부터는 NURC 사무총장으로 활약해 왔다. NURC는 르완다 헌법(제178조)상 독립적 국가기관이다. 르완다 국민의 통합·화해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연구·교육·출판을 하는 게 주 업무다. 차별·대립이나 외국인 혐오증을 야기하는 법률·문서·발언을 고발하는 한편 법정 소송을 제기하는 일도 맡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르완다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학살이다. 다른 나라의 비극과 어떤 점이 다른가.
“한 공동체 내에서 벌어졌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과 다른 점이다. 바로 내 이웃이 가해자였다. 엄청난 분노가 따를 수밖에 없는 비극이었다.”

-어떻게 단 석 달 만에 100만 명이 살해당할 수 있나.
“가장 큰 원인은 나쁜 리더십, 나쁜 정치였다. 100만 명? 그건 최소한의 통계다. 시신은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하루에 1만 명 넘게 피살됐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학살 없는 곳이 없었다. 지역 리더들이 사전에 치밀하게 공격 대상을 정했고, 재산까지 약탈하기로 서로 짰다. ‘보호해 줄 테니 교회로 모여라” 해놓고 한꺼번에 죽였다. 국가 차원의 제노사이드(대학살)였다.”

-다른 종족끼리 서로 살해한 건가.
“아니다. 르완다인은 원래부터 한 언어, 한 문화다. 중앙아프리카에서 르완다처럼 한 언어를 쓰는 나라는 없다. 이웃 콩고에는 100개 이상의 말이 있다. 르완다인은 인류학적·역사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농경(후투), 목축(투치), 숲생활(트와)로 사는 방식이 달랐을 뿐인데, 벨기에인들이 식민통치를 하면서 국민들을 분열시켰다. 억지로 인종을 나누고 증오심을 조장했다. 자기들(벨기에인)이 네덜란드어계·프랑스어계로 나뉜 것을 본떠 우리도 갈라놓은 것이다. 인종을 표시한 신분증(ID카드)도 지참하게 했다. 신분증은 대학살에 이용됐다. 학살을 인종 갈등으로 몰아가는 것은 잘못이다. 인종 아닌 사회적 구분 때문이었다.”

-실례지만, 당신은 과거 방식으로 말할 때 소수·다수 중 어느 쪽인가. 대학살 기간에 어려움은 없었나.
“(잠시 주저하다) 키갈리 시내 교회에서 적십자사와 함께 의사로 활동했다. 나는 후투였고 아내는 투치였다. 따라서 나도 투치 취급을 받았다. 군인들이 매일 와서 사람을 잡아갔다. 버티기가 참 힘들었다. 당시 ‘나도 끝이고 르완다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NURC는 통합·화해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크게 세 가지다. ‘우리는 모두 한 르완다인’이라는 시민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다음으로, 제노사이드의 원인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을 한다. 원인이 식민지 시절의 차별에 있고 반인류적인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연대하고 협동해 극복해야 할 과거라고 가르친다. 세 번째로 지역사회 내의 화해 노력을 중시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여 대화하고 자백함으로써 공동체가 용서할 길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처벌 수위가 낮아지고 분노가 잦아들게 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들어 흑인·백인 간의 오랜 인권침해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 남아공 화해정책과의 차이점은.
“남아공의 진실화해위는 한시적 기구였다. 고백과 용서 위주다. 우리는 헌법 조항에 못 박아 전면적이고 영구적으로 통합·화해 정책을 펴고 있다.”

중앙선데이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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