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공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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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욕객 10여명이 대낮에 대피 소동을 벌였다. 서울의 변화가 회현동에 있는 한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웃의 고층건물 공사장에서「다이너마이트」가 폭발, 목욕탕의 2백「드럼」짜리 물통이 더 졌다는 것이다. 그 일대의 지국이 흔들린 것은 물론이다.
「다이너마이트」폭파는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그동안 무려 70여회나 거듭 터뜨려 왔다고 한다. 주민들은 공포와 불안에 못이겨 벌써 당국에 진청을 했었다. 그러나「다이너마이트」는 여전히 폭발했고, 이번의 사고까지 빚어냈다.
최근 법원당국은 교회의 종소리도 공해라는 유권해석을 내린적이 있었다. 물론 그 소리가 주민의 안온한 생활감정을 해칠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교회의 종소리가 공해일수도 있는 상황에서「다이너마이트」의 충격음과 충격파가 아름다운 파동일리는 없다. 더구나 이것이 도심지의 밀집가에서 일어난 일이면 판명할 여지도 없다.
문제는 주민들의 진정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폭음이 계속된 것에 있다. 민주사회는 이런 경우 주민들의 진정을 흔쾌히 받아들이는데에 미덕이 있다. 또 민주시민들은 바로 그런 것에 만족감과 희망을 건다.
서울 장안의 곳곳에서 고도건물의 공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하늘을 가린 그 임립 한「빌딩」들을 쳐다 볼 때마다 서울의 신경지를 실감할 수 있다. 탄흔의, 초연의 서울은 벌써 아니다. 나날이 서울의 외관은 눈부신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외관일 뿐이다. 부도덕한 공사, 내용없는「허우대」전시, 인간의 변리와 인간성이 무시된 계획과 설계. 이들은 새로운「건설공해」의 모습으로 우리의 생활을 불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안전장치도 없이「다이너마이트」폭파의「버튼」을 누른, 그것도 역시「건설공해」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사고는 최근 서울 불광동의 한 채석장에서도 있었다. 그때도 주민들은 똑같은 절차를 밟아 진정했었지만, 무반응이었다. 당국은 아무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건설의 의미는 인간의 복지에 있다. 그러나 건설이전에 인간이 지치고, 좌절하고, 체념해버린다면, 도대체 그 의미는 어디서 찾겠는가.
회현동의「다이너마이트」폭음은「건설공해」의 경종을 울려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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