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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단종의 복위에 얽힌 충절 사육신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3년만에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뺏긴 어린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세조에게 혹독한 형벌을 받고 참혹하게 죽은 성삼문·박팽연·이개·유성원·유응부·하위지-.
이른바 사육신의 시체는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의 손으로 노량진역과 한강인도교사이 높다란 산 위에 묻혀 5백여년을 내려오고 있다.
노량진동156에 있는 4천여평의 비지정 사적의 이 묘소에는 사육신 중 성삼문 박팽연 이개 유응부 등 4명이 안치되어 있고, 하위지는 경북 선산군 고서방산에 묘소가 있으나 유성원의 묘소는 지금까지 끝내 소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역모로 몰려 죽었을 때 같은 역적모의로 처형당할까 두려워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시체를 그대로 버려 둔 것을 김시습이 이곳에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조6년(1782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묘소입구에 서있는 신도비문에 의하면, 처음 이곳에는 사육신 4명의 무덤 외에 이들과 함께 참화를 입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무덤을 합해 5개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이웃 집터 등에 들어갔는지 흔적이 없다.
사육신은 모두 세종 때 과거에 급제, 집현전학사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고 각종 편찬사업에 힘쓴 뛰어난 학자요 정치가들.
성삼문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도와 당시 요동에 유배돼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빈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묻기도 했다.
세종의 유명으로 세종의 손자인 단종(6대)을 보필하던 이들은 수양대군(세조·단종의 숙부)이 단종3년에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고 명나라 사신이 왔다 돌아가는 송별회 석상에서 세조를 죽이고 세조에 아첨하던 한명회, 정린지 등의 무리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연회당일 세조는 갑자기 운검(임금이 정좌한 앞에 큰칼을 들고서는 사람)을 그만 두라고 지시해 운검으로 내정된 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기로 했던 기회를 놓쳤다.
같이 모의하던 김질은 성사가 되지 않자 마음을 바꾸어 사실을 밀고하니 이들은 체포되어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연, 이개는 차열효수(팔다리를 말에 묶어 말을 몰아 찢어 죽이고 목을 베어 높은데 매달아두는 것)를 당하고 유성원은 성삼문 등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결, 포졸들이 와 시체를 가져다 찢어 버렸다고 한다.
역적의 가족들이라 하여 가족들도 모두 잡혀 남자들은 처형당하고 여자들은 관비로 만들었다.
박팽연은 여종의 기지로 남자아이가 살아 후손을 잇고 있으나 나머지는 모두 후손이 끊어졌다.
박팽연의 둘째아들 순의 부인 이씨가 낳은 아들을 여종이 자기의 여아와 바꾸어 주인의 아들을 여종의 아들로 삼아 목숨을 보전했다고 전한다.
박팽연의 종손은 지금 충북 중원군 신니면 신위리에 살고있다.
이들은 죽은지 2백20여년이 지난 19대 숙종 l7년에 와서 비로소 역적의 누명을 벗었다. 숙종은 이들의 충절을 높이 일러 5년에 묘의 증축을 명하고, 17년에는 관직을 복구하는 동시 이곳에 서원을 지어 사액을 민절이라했다.
민절서원은 대원군 때 서원철거로 없어지고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영조는 3년에 이들에게 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다.
서울시는 지난해까지 음력 3월3일과 9월9일 두번의 제사를 드려왔으나, 올해부터는 음력 10월6일 한번만 제사를 드리기로 했다.
묘소는 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후손이 없는 때문인지 분묘 위에는 잔디는 거의 없고 무너져 있으며, 값진 향나무·잣나무들은 손질이 안된 채 버려져있다. <현봉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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