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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망명중인「우·누」와「코이랄라」를 만나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코이랄라」씨가 수상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는「카트만두」를 방문, 수상관저에서 「코이랄라」씨 부처의 초대를 받은 바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수상이 되면 경호가 따르는 것이 통례가 아닌가』라는 필자의 질문에 「코이랄라」씨는 『나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된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나를 해치려 할 것이냐』고 대답했다. 『그럼 군대의 실정은 어떠냐』라는 질문에 『군대의 재조직은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직 손을 대지 않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군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하니까『8년간 국왕의 친위대로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대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상태로 두어도 괜찮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필자는 귀국했으나 그로부터 얼마 후 국왕이 친위병을 사용,「쿠데타」를 일으키고 국회를 해산한 다음「코이랄라씨」를 구금했다고 보도되었다. [쿠데타]의 이유로써 내각의 부패, 정쟁따위가 열거되었으나 이것은「코이랄라」내각이 성립한지 겨우 7개월 밖에 안된 때 일어났다. 그렇게 짧은 기간에는 어떤 대정치가라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리가 없다.
또 아무리 국왕의 계획이라 한들「쿠데타」란 하루에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준비만도 수개월이 걸리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앞서의 이유라는 것은 단순한 구실에 불과하고 선거결과가 밝혀진 그때부터 이미 국왕은 비상수단으로 민선내각을 타도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만일「코이랄라」씨가 정권을 잡고 최소한 2∼3년이라도 경과했다면「쿠데타」에도 얼마만큼의 이유가 인정될 수도 있었겠으나,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마헨드라」국왕이 민주주의를 억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그후 국왕은 촌락을 기초로 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주창하였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전제정치이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그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도 교도민주주의라는 것을 내걸어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이론을 부르짖어 이것이 그 시대의 유행이 되고 있었으니 국왕은 이 시류에 편승했던 것이다. 기묘한 것은 국왕은 이 왕권의 전제를 계속 유지하는 일방, 중공에 추파를 보내고 그 덕택에 중공으로부터 맹우라고까지 불려지고 있다.
이번의 황태자 결혼식에도 중공은 비행장까지 주은래의 환송을 받은 곽수약을 파견, 축하의 인사를 보내고 인민일보가 이를 대서 특필했다.
구제타파의 선봉임을 자처하는 중공이 왕정의 번영을 축복하는 것도 묘하거니와 중공에 교태를 부리는 국왕 역시 묘한 인물이다 하겠다. 「네팔」의 공산당은 「네팔」국민회의에 큰 권한이 부여되어 국민이 원하는 개혁이 착착 실시되는 날엔 자기들이 파고들 여지가 없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야심적인 국왕측에 붙게된 듯 하다.
「수카르노」가 공산당과 밀약을 맺어 자기가 마음내키는 대로의 생활을 하더라도 공산당이 그것을 비난하지 않기로 하는 대신「수카르노」는 공산당을 탄압하지 않는다는 비밀흥정으로 기초해서「인도네시아」의 국운을 쇠퇴시킨 것은「네팔」의「마헨드라」국왕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한편 자유진영측도 왕제라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관대하여 경제원조도 제공하고 있다. 이리하여 현재의「네팔」은「버마」와는 달리 자유·공산 양진영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들여 그런대로 국정을 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민의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까닭에 국민의 건설의욕은 침체해 있다.「네팔」이라고 하면「투탄」과 함께 연상되는「히말라야」산녹의 소국으로 여겨지고 있으나「부탄」의 인구가 50만도 못되는데 비해「네팔」의 경우는 국내에 1천2백만, 그밖에 동인도·북「버마」등지에 이주하고 있는 인구를 보태면 1천5백만을 넘는 무시할 수 없는 대민족인 것이다.
「유럽」의「포르투갈」이나「그리스」보다 인구는 많다. 그리고「네팔」인은 원래가 근면하고 건설적인 국민이다. 국내에는 무수한 사원이 남아 있으며 건물이나 집기, 조종 같은 것이 훌륭한 것으로 미루어 이 나라가 과거에 상당히 번영했던 나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오늘날엔「마헨드라」국왕의 요술과 같은 외교로 동서의 원조를 다 받아 들이면서 이렇다할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필자가 작년 12월「코이랄라」씨를 만난 뒤「카트만두」시를 돌아다 보며 뼈아프게 느낀 사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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