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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딜레탕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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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이 서투른 사람을 우리는 흔히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비슷한 뜻으로 유럽 사람들은 딜레탕트(dilettante)란 말을 즐겨 쓴다.

원래 이 말은 나쁜 뜻이 아니었다. '즐긴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딜레타레(dilettare)'에서 온 것으로 아마추어와 마찬가지로 직업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예술가나 예술 애호가를 의미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이 말은 재능이 부족한 예술가, 혹은 얕은 지식을 가진 전문가 쯤의 뜻으로 변했다. 오늘날 딜레탕트란 말은 아주 비판적인 표현이다.

요즘 유럽에서 이 말을 자주 듣는 정치인이 있다. 바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다. 마치 모든 것을 건 듯 완고한 그의 이라크전 반대에 대해 야당은 물론 언론들도 심심찮게 이 표현을 쓴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이다.

'이라크전에 독일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는 만큼 명분은 좋다. 그러나 배수진을 치듯 퇴로를 차단한 채 반전만 외치는 것은 딜레탕티즘이다. 외교란 국익을 최우선에 두는 엄연한 현실 게임이다.'

그러면서 독일 언론들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본받으라고 권한다. '프랑스, 넘버 원'(디 벨트), '재능있는 신사, 시라크'(슈피겔) 등 요즘 독일 언론의 시라크 칭찬은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의 주전파에 맞서 독일과 프랑스가 반전 축을 형성하고 있지만 슈뢰더와 시라크는 천양지차(天壤之差)라는 것이다.

실제 시라크는 이라크전 반대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한번도 전쟁불가를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전쟁은 마지막 수단'이라며 참전 가능성을 늘 열어둬 왔다.

특히 그는 미국 언론들이 프랑스를 동물에 빗대 공격하는 등 감정싸움으로 번지자 일종의 미인계로 나왔다. 그는 이번주 타임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을 진정 사랑한다" "프랑스의 이라크전 참가는 가능하고 필요하기조차 하다"며 예상 외의 친미발언을 했다.

그러면 시라크는 배알도 없는 인물일까. 아니다. 그는 일부 동유럽 국가가 미국에 동조하자 "입 닥치라"고 말할 정도로 성깔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나온 것은 다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서다. 미국과의 마찰로 도움될 게 없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사고는 이처럼 유연해야 한다. 원리주의자처럼 경직돼선 국익을 지키지 못한다. 바로 이게 딜레탕트, 혹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다. 벌써 아마추어 소리를 듣는 우리 새 정부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