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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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879년 8월에 통도사의 스님 이동인은 박영효 김옥균 양인으로부터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때 스님은 여비 조로 길이 두 치가 넘는 금붙이 네 개를 받아 일본에 도항했다. 그는 1년 후에 귀국할 때 이 금붙이들을 팔아서 석유「램프」,잡화품류를 구입해 왔다.
한국에 외국인이 들어온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서니까, 이른바 신식 문물에 접하기는 오래된다. 그러나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신 문물이 들어오기는 이것이 처음 일로 되어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동인 스님이 가지고온 것들은 시장에 나오지는 않고, 거의 모두 관계요인들에게 진상 된 것으로 되어있다.
밀수합동 수사 반은「엑스포 70」참관 자들이 돌아올 때 감정가격 3만원에 한하여 면세통관 시키고 신고 없이 5만원 이상의 물품을 휴대할 때에는 모두 입건키로 했다 한다.
아무리「초청 출국」이라 지만,「엑스포70」의 참관을 위해 일본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외화 단속이 심하다하더라도 이들이 일본에서 뿌리고 올 돈은 상당 할 것이다.
아무리「초청 출국」이라지 만, 그리고 또「엑스포 70」이 내건「슬로건」이 뭣이든 간에 결국은 남의 나라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그처럼 우리까지 열광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왕에 출국을 허가 한 다음에 이들의 밀수행위를 그처럼 두려워한다는 것도 좀 이상한 것 같다. 그 보다도 먼저 「진상」의 관습을 깨트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통관 한도액을 정하는 것보다 통관의 창구를 더 좁힐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월남「붐」이 일어난 다음부터 호피가 일종의「스테이터즈·심벌」처럼 애지중지되고 있는 모양이다. 없는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 호피처럼 마땅한 진상물도 없을 것이다.
왠지 우리네는 외국에 다녀오면 오래 윗사람에게 진상이 있어야하고, 또 그게 없으면 서운하게 들 여긴다. 이래저래 밀수는 끊기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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