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 궁핍 나락으로 떨어진 일가족 큰아들은 '전멸'을 꿈꾸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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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플레이스
길리언 플린 지음
유수아 옮김, 푸른숲
567쪽, 1만4800원

한바탕 피가 튄다. 살육 현장의 세세한 묘사가 눈으로 들어와, 오장육부 가득히 비릿한 피 냄새를 남긴다. 엄마와 어린 두 딸이 무참히 살해됐다. 범인은 그의 아들이자 오빠 벤. 작가는 소설 초반부터 사건의 모든 패를 까놓는다. 미스터리는 없다는 듯이. 하지만 스릴러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모든 패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소설 안팎으로 진범을 찾기 위한 추격전은 시작된다.

 판을 펼친 작가는 여유롭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묵직한 소설인데도 사건 발생 18시간 전의 일상부터 풀어놓는다. 사건 순간까지 분량을 채우려면 18시간을 초 단위로 묘사해도 모자를 것 같다. 영민한 작가는 세 개의 시선을 배치해 사실상 시간을 늘린다. 소설 속 사건 추격자이자 살육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딸 리비의 현재와, 살해당한 엄마 패티와 살인자 벤의 과거가 숨가쁘게 맞물려 돌아간다. 리비는 2009년 현재에서, 패티와 벤은 1985년 사건 발생 18시간 전부터 살육의 순간을 향해 돌진한다.

 초장부터 페이지를 확 뒤로 넘겨 세 시선이 한데로 모이는 순간을 미리 보고 싶은 욕구가 일지만 그럴 수 없다. 작가의 ‘독자몰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그러하기에 잔인하다. 소설을 읽을수록 무엇을 추격하고 있는지조차 잊게 할 정도다.

 ‘울적함’ 때문이다. 엄마 패티가 늘 사용했다는 단어. 살아남은 리비의 묘사에 따르면 “‘우울함’보다 더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말이다. 리비의 가족이 모두 생존했던, 1985년의 미국 중앙부 캔자스주의 경제상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구잡이 대출로 땅을 사고 농장을 키웠던 리비 가족도 치솟는 이자 탓에 파산 직전에 몰린다. 가장인 아버지는 주정꾼에 마약쟁이고, 아이 넷 딸린 엄마의 일상은 고단하다. ‘전멸’을 꿈꾸는 맏아들 벤의 18시간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사람들은 자기 손을 떠난, 걷잡을 수 없이 무력한 상태 속에 있다. 모두가 범인이고, 모두가 희생자일 수밖에 없는 증상들이 소설 곳곳에 덫처럼 놓여 있다. 이 예사롭지 않은 일상의 덫이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을 높인다. 덫도, 결말도 모두 부정하고 싶어진다.

 작가 길리언 플린은 지금까지『다크 플레이스』를 포함해 세 편의 소설을 내놨다. 지난해 출간한 『나를 찾아줘』는 아마존 종합 1위 등을 차지하며 전 세계 출판업계를 뒤흔들었고, 곧 영화로 만들어진다. 이 소설 역시 영화로 나온다. 샤를리즈 테론, 니콜라스 홀트, 클로이 모레츠로 최근 캐스팅이 확정됐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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