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맞서는 지구촌 시민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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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초강대국 미국에 필적할 만한 세력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정답은 '예스'다. 하지만 특정 국가는 아니고 단체나 그룹도 아니라는 게 힌트다.

뉴욕 타임스는 17일 지난 주말 뉴욕을 비롯해 전세계 10여개 도시를 휩쓴 반전 시위대야말로 지구상에는 '미국'과 '지구촌 시민여론(world public opinion)'이라는 두 개의 수퍼 파워가 있음을 일깨워줬다고 보도했다.

뉴욕 타임스가 언급한 지구촌 시민여론은 그동안 유엔 등에서 외교적으로 통용돼 왔던 '국제여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국제여론은 여론이라는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개별 국가 대표들의 입장을 집합적으로 표시한 데 불과했다. 유엔에서 특정 사안을 결의할 때 지지 국가의 숫자가 많으면 그에 대해선 무조건 국제여론이라는 명분과 정당성이 부여되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약소국은 초강대국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외교 현실에서 국제여론은 결국 미국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구촌 시민여론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뉴욕 타임스가 언급한 대로 범 지구촌 차원에서 '새로운 길거리 권력(A New Power in the Streets)'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나라의 일부 도시에서도 반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새로운 권력의 성격은 분명해진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데는 역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정보통신 수단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같은 지구촌 시민여론에 대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참모들과 공화당 강경파들은 부시 대통령에게 "무시해버리라"고 충고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보도했다.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경우 이라크 국민들을 언급하면서 반전운동을 벌이는 길거리 시위대에 대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라크 국민들은 독재자 후세인의 치하에서 살고 있고 후세인이 제거되면 더 행복해질 텐데 왜 전쟁을 반대하느냐"는 논리를 폈다.

그런 주장은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기사찰을 통해 후세인을 무장해제시킬 가능성이 있는데도 왜 꼭 전쟁을 해야 하느냐"는 반박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고 뉴욕 타임스는 분석했다.

프랑스 도미니크 드 빌팽 외무장관도 유엔 안보리에서 "당장 전쟁을 하는 게 유엔 사찰단이 철저한 무기사찰을 하는 것보다 이라크의 무장해제에 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전쟁도 심리적인 요인과 동기 부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지구촌의 '길거리 권력'이 무서운 것은 반전시위가 자꾸 일어나면 이라크전을 지지했던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도 표 때문에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은 지난 16일 폭스TV에 나와 "후세인의 손에서 놀아나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길거리 권력을 비판했다.

뉴욕 타임스는 지구촌 시민여론, 혹은 길거리 권력이 1989년 사회주의 해체를 몰고왔던 동유럽의 민주화 시위나 1848년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던 계급투쟁만큼 치열하지는 않지만 어떤 정치인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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