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처럼 은밀한 개헌 따라하자 주장한 아소 실언인가 신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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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제조기로 유명한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가 또다시 사고를 쳤다. 이번에는 나치 독일의 수법을 배워 헌법개정을 추진하자는 망언을 뱉어낸 것이다.

 아소 부총리는 지난 29일 밤 일본기본문제연구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나치 정권 시절을 언급하며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은 (나치 정권에 의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며 “이처럼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하게 한 수법을 (일본이) 배우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현대적 헌법의 효시로 ‘가장 이상적이었던 헌법’이라 불린다. 나치의 수괴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된 뒤 이를 무력화했다. 입법권 등 의회의 고유권한을 말살하고 자신이 이끄는 정부가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소의 발언은 개헌 논의는 시끄럽게 할 게 아니라 조용한 논의 속에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굳이 나치를 인용하며 일본의 개헌문제를 거론한 것은 그 노림수가 결국 히틀러식 전제주의와 군국주의를 내심 지향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교도(共同)통신도 이날 “나치 정권을 거론한 대목은 논쟁을 야기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날 아소가 참석한 강연회의 성격 자체가 문제다. 행사를 주최한 일본기본문제연구소의 이사장은 일본 내 극우세력의 ‘얼굴’로 활약하는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 일본 우익세력의 사령탑인 일본회의(日本會義)와 깊숙한 관계다. 아소와 함께 이날 행사에 참석한 다쿠보 다다에(田久保忠衛) 교린대 명예교수는 일본회의의 대표위원이다. 또 니시무라 신고(西村眞悟) 중의원 의원은 최근 “아직도 일본에 한국인 매춘부가 우글거린다”는 망언을 뱉어낸 인사다. 참석 인사들의 면면만 봐도 이날 행사의 취지와 노림수가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아소의 ‘나치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8년 8월 자민당 간사장 취임 인사차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을 방문했을 때 “나치 독일도 국민이 한번 시켜보자고 해서 시켰더니 저렇게 됐다”고 비아냥거렸다. 이때도 바이마르 공화국 이야기를 꺼내며 횡설수설했다. 나중에 아소는 ‘나치=민주당’이라 한 자신의 발언을 주워담느라 고생했다. 그 때문에 이번 아소의 발언도 개념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바이마르 헌법의 폐기 당시 상황과 현 일본의 상황이 묘하게 맞물리면서 파장이 더 커지고 있다.

 먼저, 히틀러는 총리가 된 후 ‘수권법(授權法)’을 통해 평화헌법인 바이마르 헌법을 무력화했다. 일본의 자민당 정권도 마찬가지다. 전쟁과 무력행사 포기, 국가교전권 불인정을 골자로 하는 평화헌법을 뜯어고치려 하고 있다. 일본의 현행 헌법은 가장 평화적인 헌법이라 불린다. 아소가 이날 강연회에서 “호헌을 외치면 평화가 온다는 생각은 오산”이라고 주장한 것은 현 자민당 정권의 오만한 인식을 대변한다.

 또한 당시의 독일과 현재 일본의 정치구조가 교묘하게 일치된다. 히틀러는 총리가 된 뒤 33년 열린 총선에서 전체 의석 608석 중 230석을 얻어 제1당이 됐다. 하지만 단독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연정을 구성해 바이마르 헌법을 무력화시켰다. 일본 자민당도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의회를 장악했지만 개헌 발의선에는 미치지 못했다.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물론 일본유신회, 모두의 당 등 개헌에 적극적인 당들과 손잡고 개헌을 추진하려 하는 상황이다.

 경제정책으로 인기몰이를 해 정권의 기반확대를 꾀하는 수법도 유사하다. 600만 명의 실업자를 물려받은 나치 정권은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일시적 경제회복에 독일 국민은 환호했다. 아베 정권도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고 공공사업에 과감히 정부예산을 쏟아부어 경기를 부양하는 ‘아베노믹스’로 인기몰이 중이다.

 제1야당 민주당의 한 인사는 아소의 발언을 “결국 헌법 96조의 개정(개헌발의 조건을 중·참의원 각각 ‘3분의 2 이상’에서 ‘과반’으로 완화하는 내용)을 통해 평화헌법을 무장해제시킨 뒤 핵심인 9조 개정으로 나아가겠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한편 아소는 이날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 패전일인 8월 15일에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참배할지 여부에 대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에게 경의와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며 “특별히 전쟁에 진 날에만 가는 것은 아니며 조용히 가면 된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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