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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정치주역(8)-이후락|정치경험 살려 원내 진출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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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후락씨가 박정희대통령 곁에 있는 동안 그는 비서실장이상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정치무대의 전면은 아니었지만 그는 특이한 무게로 60년대의 정치적 강자였다.
이씨는 5·16혁명 얼마 뒤에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되면서 박정희대통령과 인연을맺었고 그로부터 그 인연은 거의 운명적인 것처럼 이어져 갔다.
오랜 군생활에서도 줄곧 참모만으로 일을 해온 이장군은 박대통령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참모였던 것 같다.
박대통령의 중요한 결단에는 그의 건의와 조언이 적지 않은 힘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갈 때 박의장이 군복을 벗고 출마하기로 결심한 것, 제2여당으로구상되었던 범국민정당을 택하지 않고 공화당후보로 첫 선거에 나서게된 것, 두 차례 선거의 전략과 개헌추진등 중요한 결정에는 이실장의 지혜가 많이 스며들었다는 게 정설이다.
치밀한 두뇌는 「컴퓨터」라고 불리며 눈 한번 깜작깜작할 때마다 새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그의 지모는 알려져 있다. 혁명주체가 아니면서도 긴 세월을 권력의핵심에 있던 것은 이 같은 그의 재능 탓이라고들 했다. 박대통령의 지도권이 확립되고 강화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이씨가 누릴 수 있는 권력의 폭도 질적으로건 양적으로건 넓어져갔다.
선망과 질시의 표적이기도 했던 이씨의 독특한 위치는 당권신장을 내세운 공화당엔 달갑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당과 행정부의 불협화가 있을 때나 요직개편 논의가 당에서 나올때는 거의 이비서실장이 염두에 두어졌다.
이 미묘한 갈등에서 이실장은 늘 수세였다.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실장이 스스로박대통령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다기보다 박대통령의 뜻을 미리 살펴 그 뜻을 실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박대통령에게 3선의 길을 터준 개헌작업은 박대통령을 위한 그의 「봉사」의 압권이었다.그는 개헌추진을 결심한 불과 몇 사람의 개헌주체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리더」였다.
개헌의 논공을 하자면 그를 앞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박정희종교의 교도』임을 자처하면서 개헌후 청와대를 물러나갔다.
이씨의 퇴진을 권력의 편중에 대한 제동이라고 본다면 이를 계기로 「실력자시대」는 종언을 고한 것이기도 하다.
청와대비서실의 기구확장 (68년초)이 「옥상옥」격의 「소내각」이라고 불린 것이라든지, 행정부우위에 대한 당 및 국회의 불만이 이씨에게 쏠렸던 것은 권력내부에서의 이씨의 체중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씨의 후임자가 취임 첫 과업으로 청와대비서실의 기구축소에 착수한 것은 권력의 다핵화를 희망한 박대통령의 뜻에 따른 조치가운데 하나였다.
최고회의에 들어갔을 때 37세였던 이씨는 흰 머리칼이 희끗희끗 늘곤 귀거래사를 읊었다.
그가 물러선 것은 개인적으로는 박대통령과의 관계를 떠나 있을 수 없었던 특이한 좌표를청산한 계기였다.
이제 그에게 열려진 선택의 문은 넓다. 여러 가지 진로가운데서 안산을 발판으로 국회에진출할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다.
정치의 구석구석을 잘 아는 그는 원내에 진출할 경우 「로·메이커」로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바람을 일으킬 것인지는 쉽게 짐작이 안 간다.
그가 선택하는 앞으로의 행로가 어떤 것이건 그 스스로의 그림자를 그리는 새로운 국면에서 전개된다고 봐야할 것이다.<이억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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