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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관과 부실 기업 국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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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0년대가 미국의 무상원조를 배경으로 한 전화 복구기였다면 60년대는 차관을「파이프·라인」으로 한 경제 개발기다. 50년대에 정부가 미국에서 공여 받은 무상 원조 규모와 맞먹는 20억불 이상의 외자가 이번에는 언젠가 갚아야 할 차관으로 유입되었다.
61년의 군사혁명과 함께 출범한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필요한 투자 재원 조달을 목적으로 도입이 본격화 한 차관은 그간 질과 양의 양면에서 많은 변환과 부작용을 노정했으며 이러한 우리 경제의 차관 의존 기조는 60년대말에 다가서면서 오히려 심화되었다.
60년대의 초기 3년간 차관은 거의가 상주기간이 20년 이상 40년에 금리가 극히 저렴한 공공차관이었다. 차관선 거의 미국에 국한되다시피 했으며 용도는 전력·시멘트·비료 등 주로 기간산업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연간 도입액도 고작 5백만불 내외에 머물렀다.
그러나 미국의 원조가 급격히 줄어들고 고투자 정책이 진행되는데 대응하여 외자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64년부터는 공공차관보다 조건이 불리하나 비교적 도임이 용이한 상업차관이 대량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일본보다는 한국이 서둘러 해결해야 할 명제로 부각시켰으며 65년6월22일 정부는 마침내 유·무채 합쳐 도합 8억불 이사의 경제협력 자금을 10년간에 일본에서 분할 공여 받기로 하는 내용의 협정에 사인했다.
이를 개기로 대일 상업 차관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고 그래도 모자라는 투자 재원 확보를 위해 서구 프랑스 영국 등 서구 각국의 차관이 경제협력 다변화의 기치 밑에 도입되었다. 공공차관에서 상업차관 중심으로 변질된 차관 형태는 60년대 후반에 와서 또 한번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규모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현금차관이 성행한 것이다.
68년도 차관 도입액은 67년의 배가 넘는 5억8천만불이며 69년에는 10월 현재로 이미 7억5천만불을 기록, 지금까지의 피크를 이루었고 69년 들어 성행한 현금 차관은 1억불을 훨씬 넘어섰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외자 조달을 목적으로 도입해온 차관이 나중에는 내자 부족을 메우는 방편으로까지 수용되었고 때로는 갚아야 할 빚을 다시 빚으로 갚는 수단으로 변질 된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그간의 방만하고 무원칙했던 외자 도입 정책이 빚어낸 값비싼 시행 착오다. 내자 조달 능력과 시장, 그리고 국제 경쟁 단위를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차관을 허용함으로써 수많은 차관 업체가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자기 자금 한푼 없이도 차관만 있으면 대기업 하나쯤 세우기 어렵지 않고, 또한 재벌도 될 수 있다는 풍조가 조성되고 이에 따라 많은 기업군과 유명·무명의 재벌이 하루아침에 출현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부채 상환 능력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해 둘 수도 없는 부실기업 집단을 남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마침내 부실기업에 대한 획기적인 수술에 나섰다. 이러한 수술의 필요성은 재무부에 의해 대부분이 외화 도입 업체인 이 부실기업들이 ①생산 규모의 국제 단위 미달로 대량 생산을 통한 원가 가감을 기하지 못했고 ②외자 도입 규모에 비해 자기 자금 조성이 부족하여 건설 및 운자금까지 타인 자본에 의존함으로써 금리 부담이 무겁고 동시에 원가고에 허덕이고 있으며 ③정부 당국과 차관업계가 차관 전에 국내 수요 전망을 정확하게 파악치 못하여 판매마저 부진하고 ④기술과 시설이 모두 낙후돼 있기 때문이라고 간명히 요약되었다.
69년5월하순 PVC업체인 공영화학과 대한 「플라스틱」정리 조처를 스타트로 당시 재무부이재국장이던 장덕진 현 청와대 경제제3수석비서관이 주동이 되어 단행한 이 정리 작업에서 정부는 8월14일 제7차 정리 조치에 이르기까지 불과 3개월간에 30개 업체를 정비해 버렸다. 정리된 30개사의 총자산 7백74억원 가운데 타인 자본은 95%인 7백32억원.
경제계는 정리 조치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한때 반발의 움직임을 보였으나 내심으로는 오고야 말 것이 왔다고 체념을 했다. 벗겨보면 부실기업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리조치는 제1단계에 불과하며 그 사후처리와 더 많은 부실기업을 계속 정비해야 할 과제가 엄청난 상환부담과 함께 60년대의 커다란 미결 과제로 남겨졌다.
즉 외자의 대량 도입을 싸고 격동했던 60년대는 부실기업의 대량 정리로 「피날레」를 장식, 국민에게 심한 좌절감을 안겨준 것이다.<변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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