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풍향계 여의도엔 '애미와 매미'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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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였던 A씨는 4년 전 회사를 나와 여의도역 인근 오피스텔에 사무실을 차렸다. 자신과 지인들의 돈을 모아 7억원가량을 운용한다. 펀드 시장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매년 연봉이 만족할 만큼 오르지 않자 일명 ‘부티크’(개인이 하는 투자자문 및 운용사)로 전업한 것이다. A씨는 3명의 개인투자자와 사무실을 공유하며 임대료를 나눠 내고 있다. A씨의 사무실에선 두어 달 전 개인투자자 1명이 나가고 새로운 이가 둥지를 틀었다. A씨는 “상반기 악재가 겹치며 손실이 적지 않았지만 2010년 장이 좋을 때 낸 수익으로 버티고 있다”며 “투자가 여의치 않아 여의도를 떠나는 경우도 많지만 증권사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나온 고참 애널리스트들이 곧 빈자리를 채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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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씨 같은 사람을 여의도 증권가에선 ‘매미’로 부른다. 매니저와 개미 투자자의 합성어다. ‘애미’도 있다. 애널리스트 출신 개미 투자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업계 출신 투자자는 여의도 일대에 적게는 500명, 많게는 1000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의도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주요 오피스텔 26개에 이런 투자자 3명이 모인 사무실이 10개씩만 들어가 있다고 쳐도 700명”이라고 말했다.

 ‘매미·애미’ 투자자는 요즘에도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게 증권계의 전언이다. 한 대형 증권사의 투자전략 파트를 맡던 한 연구원도 올봄 ‘애미’로 변신했다. 그는 퇴임하면서 기자들에게 메신저를 돌려 “지금이야말로 시장에 베팅해볼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소신파’는 소수다. 대개 증권사의 구조조정 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온다. 거래대금 감소와 금리 상승에 시달리는 증권가엔 요즘 연봉 삭감과 지점 축소 등 칼바람이 불고 있다. 결국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직원들이 개인투자자로 전업하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다. 한국투자증권 문춘근 홍보팀장은 “올여름 유난히 커진 여의도 매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직원들끼리 어려워진 업계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고 전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10월을 정점(1488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증권사 난립으로 수수료 인하 경쟁이 심한 데다 월별 거래대금은 지난해 초보다 2조원가량이 적다. 젊은 층의 주식 투자 비중이 줄고 있는 것은 증권사들이 가장 아파하는 대목이다. 펀드 열기도 식으면서 자산운용업계는 지난해 전체 84곳 중 28곳이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자산 관리 쪽으로 전환한 일부 대형 증권사를 빼고 상당수의 중소형 증권사 지점들은 임대료도 벌지 못하고 있는 곳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제도권을 뛰쳐나와 ‘실력 발휘’에 나선 ‘매미·애미’ 투자자의 성적은 어떨까. 일반 투자자와 그리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스스로의 실력과 운만으로 시장을 이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펀드매니저는 “회사에서 자금과 시스템의 뒷받침을 받으며 투자할 땐 몇 차례 투자에 실패해도 만회할 기회가 있지만 시장에 혼자 나서면 몇 차례 성공해도 한 번 실수에 무너지게 마련”이라며 “2분기 증시 폭락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물론 소수의 성공 사례도 있다. 2000년대 후반 일찍 투자를 시작해 돈을 번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는 최근 증시 폭락으로 자본 잠식 상태에 이른 투자자문사를 사려 하는 경우도 있다.

 ‘매미·애미’의 덕을 보는 건 여의도 부동산이다. IFC 등 대형 건물이 들어서며 늘어난 공실을 이들이 채워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많이 몰린 건물엔 오피스텔 이름과 투자신탁을 합성한 ‘에스트레뉴투신’ ‘트럼프투신’ ‘라이프투신’ 같은 별명이 붙어 있다. 여의도역 인근 증권가에 있는 오피스텔은 1등급, 국회의사당·샛강역 인근은 2등급, 교통이 불편한 63빌딩 인근은 3등급으로 분류된다. 운용하는 자산 규모가 클수록 임대료가 비싼 중심지에 자리를 잡는다.

 여의도 애미·매미들에겐 지난 2분기가 힘든 시기였다. 뱅가드 이슈에 버냉키 쇼크가 겹쳐 증시가 폭락하자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짐을 싸는 이들의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독특한 ‘사무실 공유 문화’ 때문에 실제로 매물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에스트레뉴 임대 매매를 주로 하는 SKY 부동산 관계자는 “여의도 전체의 공실률이 높다고 하지만 1등급 오피스텔은 투자자문회사 등의 수요가 꾸준해 빈 사무실이 없다”며 “임대 문의가 하루에 2~3건씩 꾸준하다”고 말했다.

정선언·윤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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