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윤보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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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해위 윤보선씨는 5·16세력과 가장 직선적으로 대결했던 60년대 야당의 지도자. 그는 5·16에 대한 가장 대담한 도전자였지만, 5·16을 양해 내지 긍정했다는 사실 때문에 일부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당시의 사정이 어쨌든 그는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불과했지만,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제2공화국 붕괴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62년3월 고정법을 반대, 대통령 자리를 물러났고 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민정당을 창당, 군정세력에 도전했다. 그는 이 대결에서 전 대통령이라는 후광과 반군정의 바람을 타고 박정희 후보에 15만표 차까지 육박했다. 그는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국민의 반 가까운 지지를 업고 야당지도자로서의 절대적인 위치를 확보했었다.
해위는 대흥투쟁방식과 대내영도에 오직 「강경」만을 알았다. 요일 회담반대투쟁에서 그는 의원직 총 사퇴를 배수의 진으로 강경투쟁을 펴갔지만, 6·3계엄 사태아래서 해엄협상을 모색한 온건파가 야당진영에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여야의 해엄협상은 성공했으나 협상 위법 중의 학원 및 언론 규제 입법을 계기로 야당은 심한 내홍에 부딪쳤다. 윤씨는 여야묵계설을 이유로 제2인자였던 유진산시의 축출을 선언하고 『해위냐 진산이냐』를 택일하도록 요구했다.
해위는 끝내 유진산씨의 서명을 관철했으나 이 「진산파동」으로 상처는 유진산씨만이 입은게 아니라 해위의 권위주의도 당 내외에서 회무를 받게된 것이다. 그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의 물결을 타고 야당통합을 실현했다. 그러나 통합야당인 민중당은 그를 정상에 앉히지 않았다. 진산계와 통합상대인 민주당계가 연합했던 것이다.
필경 이를 납득하지 못했을 윤씨는 한일협정비준파동을 계기로 민중당을 탈당, 의원직을 버렸고 다른 7명의 야당의원이 그를 뒤따라 신한당을 만들었다.
두개로 쪼개졌던 야당은 67년 선거 직전, 이른바 4자 회담을 통해 다시 통합했다.
해위는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박정희 후보에 대한 두번째 도전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선거에서 4년전 선거에 비해 뒤떨어지는 2백만 표차로 패배한 뒤 정치일선에서 후퇴했다.
해위 노선은 명분론을 좇는 극한투쟁이었다. 명분에 따라 일단 잘못된 것으로 규정했을 때 그에게는 추호도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사상논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한일협정을 제국으로, 월남파병을 청부전쟁으로 강타했다. 그는 전국을 누볐고 데모에도 앞장섰다.
해위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그에게서는 오히려 유교적 「모럴」과 체취가 더 강하게 풍겼다. 그의 보수적인 권위주의는 그의 가풍에서 이룩된 성격과 전직 대통령이었다는데서 나온 것일까.
지나친 명분론은 정치가 갖추어야할 일면인 산숙성을 잃게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선 50년대의 야당지도자(해위 신익희, 유석 조병옥씨 등)들이 가졌던 폭과 포용력을 찾을 수 없었다고 아쉬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10년간의 야당체질과 나아가 정치풍토는 명분을 중시하고 강경을 앞세운 윤씨에 의해 얼마간 영향 받았마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60년대를 넘기면서 지금 야당의 보수체제가 세찬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해위풍」 을 극복하려는 시련인 것일까. <이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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