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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투자는 주거의 질 개선 … 보편적 복지로 봐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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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호 23면

“서울과 수도권 근로자 넷 중 한 사람은 출퇴근을 하는 데 두 시간 이상을 쏟아붓는다. 일자리가 서울에 집중된 탓에 이런 현상은 단순한 교통 문제가 아니라 사회·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선진국은 철도 늘리는데 … 거꾸로 가는 한국

교통연구원 이재훈 철도정책기술본부장의 말이다. 철도 전문가가 ‘교통 복지’ 개념을 제시하는 건 이유가 있다. 지난해 말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들의 출퇴근 소요 시간은 평균 50분을 넘어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3개국의 평균치(38분)를 훨씬 웃돈다. 국가별 순위로는 22위, 최하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비슷하다. 도쿄와 수도권에만 4000만 명이 몰려 사는 일본보다 더 심각하다. 특히 경기도·인천 거주 통근자의 23.8%인 147만여 명이 매일 두 시간 넘게 길에서 시달린다. 이 본부장은 “통근 시간이 길어지면 삶의 질을 해치게 된다. 광역철도 교통망을 확충하는 게 대안이다. 출퇴근 시간을 줄이는 게 바로 교통 복지”라고 말했다.

출퇴근 소요시간 OECD서 열악한 편
친환경 교통수단인 철도를 복지 개념과 연결시키는 논의가 최근 활발하다. 정부는 5월 말 재정전략회의에서 향후 4년간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을 11조6000억원 줄이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유는 대통령 공약사업, 특히 복지 분야의 재원 확충을 위해서다. SOC 투자 축소 때문에 도로·철도 신규 투자는 직격탄을 맞았다. 2011년 4월 수립된 ‘제2차 국가 철도망 구축 계획’의 신규 사업 대다수가 보류될 위기에 처했다. 이 중에는 경기도가 추진해 온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2018 평창 겨울올림픽과 관계된 원주~강릉, 여주~원주 구간의 철도도 포함된다. 윤진식(새누리당) 의원 등 국회의원 17명이 철도 투자를 줄여서는 안 된다는 건의서를 정부에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경기도 관계자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GTX 사업 착수를 위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2011년 말 시작했지만 1년7개월이 넘도록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철도 분야 신규 투자를 줄이면 GTX가 표류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2008년 경기도가 제안한 GTX는 서울 삼성역·서울역·청량리역 3개 역사를 거점으로 서울을 X자 형태로 관통하는 3개 노선, 총연장 174㎞의 고속철도망이다. 경기도 화성 동탄과 서울 강남 삼성역을 연결하는 구간의 상당 부분은 현재 건설 중인 KTX와 함께 쓴다. 최고 속도 시속 200㎞의 열차를 투입해 도심 접근 시간을 최소화한다는 게 골자다. 계획대로라면 동탄에서 서울 삼성역까지 19분, 경기도 일산에서 삼성역까지는 22분에 도착할 수 있다. 기존 철도·도로망을 이용할 때 걸리는 시간의 4분의 1이다. 그만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많은 전문가가 철도야말로 환경·복지와 밀접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선진국들은 요즘 철도 투자에 적극적인 자세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대도시 철도망을 갖춘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은 2008년부터 런던 대도시권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고속철도망을 새로 깔고 있다. ‘크로스 레일(Cross Rail)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사업에는 2017년까지 159억 파운드(약 27조원)가 투입돼 총연장 118.5㎞의 광역철도를 건설한다. 크로스 레일은 최고 시속 160㎞의 고속 열차를 런던 외곽에서 도심권의 9개 신규 역사로 연결한다. 도심 역사에 도착한 승객들은 이미 구축돼 있는 지하철·경전철 등 1253㎞의 철도망으로 갈아타고 도심 곳곳으로 접근할 수 있다.

런던보다 더 촘촘한 철도망을 갖춘 파리도 올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파리 대도시권 광역급행철도망(Grand Paris Express) 계획이다. 파리 도심과 위성도시들을 순환선 형식으로 연결할 계획이다. 총연장 155㎞의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파리 대도시권 자체가 확대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철도에 관심이 적었던 미국도 남(南)캘리포니아 고속철도 등 새로운 철도망 건설에 2017년까지 530억 달러(약 58조원)를 투자한다. 19세기 철도 붐 이후 100여년 만의 ‘철도 르네상스’라는 평가다.

선진국들은 친환경 철도 투자 늘려
이미 탄탄한 SOC를 자랑하는 선진국 대도시들이 철도 투자를 늘리는 이유는 뭘까. 철도의 친환경성과 효율성이 새롭게 확인된 게 첫째 이유다. 전기로 움직이는 철도는 대량 수송 시 다른 어떤 교통수단보다 친환경적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세계철도연맹(UIC) 자료에 따르면 100명이 1㎞를 움직일 때 발생하는 이산화탄소(CO2) 발생량은 철도가 4.79㎏으로 항공(23㎏), 자동차(33.5㎏)보다 훨씬 적다. 승용차의 7분의 1 수준이다. 교통 혼잡 해소를 통한 생활 수준의 향상, 즉 복지 수준의 접근도 함께 고려된다. 특히 철도는 경제·문화 중심지인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높은 접근성을 제공한다. ‘철도 복지’ 측면이 둘째 이유다.

서울시립대 박동주(교통공학) 교수는 “국내에서도 철도 복지의 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엘리베이터와 경사로·요금 할인 등 선택적인 철도 복지는 그동안 꾸준히 개선돼 왔다. 반면 철도망을 통해 도심과 외곽 지역을 연결해 주거·생활 수준을 높이는 ‘보편적’ 철도 복지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인식이 약한 편이다. “철도 SOC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 등에서도 이런 부분이 간과됐다”고 박 교수는 강조했다.

교통연구원 최진석 철도정책실장은 “기존 노선과 중복된다는 시각으로만 보면 새로운 광역 철도망의 건설은 요원하다. 운행 속도·혼잡률·적정 좌석비율 개선을 통한 실질적인 쾌적성의 향상을 복지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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