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이슈] 국립과학수사연구소 50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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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영수 연구사가 사기도박에 쓰인 카드를 자외선 카메라로 촬영해 감정하고 있다.최승식 기자

1일 오후 서울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감식센터. 흰 마스크를 쓴 연구원이 성범죄 현장에서 수거된 하얀 휴지 조각에 과산화수소수를 떨어뜨리자 휴지가 분홍색으로 변한다. 정액이 묻어 있다는 증거다. 정액에서 추출된 유전자(DNA)는 증폭기를 통해 1억 가닥으로 늘어난다.

유전자형 분석기는 컴퓨터 화면에 'xy, 17, 19, 13…'라는 DNA의 고유한 기호를 띄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 기호는 용의자의 DNA와 대조, 범인 검거에 사용된다.

같은 시각 영상분석실에선 한 연구원이 절도 용의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찍힌 CCTV 화면을 컴퓨터로 분석하고 있다. 둥글고 뿌옇던 얼굴 윤곽이 뚜렷해지고, '키 165cm'라는 신장 기록이 나온다. 국과수가 2001년 자체 개발한 이 프로그램은 CCTV에 찍힌 얼굴을 3차원으로 확대해 안면의 굴곡까지 식별한다.

1955년 설립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지난달 25일 창설 50주년을 맞았다. 35명의 직원이 부검과 초보적인 혈액형 감정 등 단순 감정을 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한 국과수는 이제 세계적 수준의 DNA 분석기술 등을 보유한 과학수사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현재 관련 분야 석사 100명과 박사 54명을 포함해 263명의 직원이 연간 22만여 건의 감정업무를 처리해낸다. 유전자형 분석기.말디-토프(레이저를 이용해 물질의 성분을 분석하는 장비) 등 한 대에 수억원이 넘는 첨단 장비들을 갖추고 사소해보이는 것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2003년 10, 11월 잇따라 발생한 서울 삼성동.혜화동 노인 피살사건에서 유일한 증거물은 안방 문에 찍힌 범인의 발자국뿐이었다. 경찰은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의 신발 93켤레를 대조했지만 허사였다. 이 사건 범인인 유영철 검거 후 국과수는 유씨가 갖고 있던 신발들의 굽을 말디-토프 등으로 검사해 그 중 한 켤레의 굽이 발자국의 주인공임을 밝혀냈다. 유영철은 현재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국과수는 1987년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 때 가장 큰 주목을 끌었다. 당시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씨를 부검한 국과수 황적준(고려대 교수)박사는 "경부(목)압박에 의한 질식사"라는 감정서를 발표해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다.

최근 국과수는 법의학 기술을 바탕으로 사회복지에도 기여하고 있다. 경찰과 함께 유전자 데이터 베이스(DB)를 이용해 미아 찾기에 나섰고, 지난해 말에는 남아시아 쓰나미 피해를 본 태국 푸껫에서 사망자 신원 확인작업을 벌였다.

국과수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높지만 투자가 활발하지 못해 만성적인 장비.인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86년 100명도 채 안 되는 직원을 위해 지어진 현재의 건물은 각종 첨단 장비와 사건의 증거물을 보관하기에 턱없이 비좁다. 반면 고된 업무와 낮은 처우 때문에 기피 분야로 꼽히는 법의학과는 빈 자리조차 채우기 힘든 형편이 수십 년째 계속되고 있다.

박성우 소장은 "인구 190만 명인 미국 마이애미에만 30여 명의 법의관을 두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전체에 법의관이 모두 30명에 불과하다"며 "과학수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체계적인 지원과 인력 양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과수는 해마다 40억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해 2010년까지 장비 270종을 보강할 계획이다.

임장혁.박성우 기자 <sthbfh@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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