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강자의 문화유산만 남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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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세계에 전운(戰雲)이 가득하고 지난 주말에는 60여개국에서 사상 유례없는 반전(反戰) 시위가 있었다고 한다. 건축 사학자로서 마음은 더 무거웠다. 인류문화사의 주된 흐름은 언제나 강자의 건축물로 표징된다.

반대편 약자의 건축물은 그 운명이 '전쟁과 평화'사이에 끼여 있다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귀중한 역사적 유산들이 주변국의 침입에 의한 말발굽과 방화로 사라졌다. 가까운 시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과 유엔군의 참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0여년 전인 1991년 새해 벽두부터 우리가 들어야 했던 것도 페르시안 걸프로부터의 '전쟁 소리'였다. 그것도 마치 전자게임 같은-. 그러나 사실 나 자신은 걸프 전쟁에서 누가 이기든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정작 중요했던 것은 이라크 내의 수많은 세계적 문화유산이 전쟁으로 대량 파괴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후세인은 찬란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본산지인 바빌론의 유적 복구에 정열적으로 몰두했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이라크의 역사적 모태이자, 세계 4대 문명권의 하나다. 그 핵심인 바빌론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독일 고고학자의 발굴(1899~1912)에 의해서였다.

바빌론은 바그다드 남쪽 90㎞의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유산을 갖고 있는 곳인데 당초 이라크인들은 유적을 내팽겨져 놓았다. 그러나 78년부터 후세인은 복원계획을 세웠고 86년부터 본격적인 복구사업에 들어갔다.

특히 고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유적 복원에 힘썼다. 느부갓네살은 역사적으로 유대왕국을 무너뜨렸고 시리아.요르단.쿠웨이트 지역을 손아귀에 넣은 이라크의 전설적 영웅이었다. 그의 궁궐 내의 지규랫과 바벨탑은 이미 유명한데, 또 다른 장소에는 공중정원(Hanging Garden)이란 값진 유적도 있다.

전쟁이 예고되고 있는 와중, 어떤 뉴스 에서도 이 건축물 파괴의 문제를 우려하는 사람이 없음은 안타깝다. 91년 걸프전때에도 스커드 미사일의 성능과 전황에 대한 보도만 있었지 건축문화 유산에 대한 소식이나 논의는 들어보지 못했다.

바그다드는 매일 새벽 미군과 다국적 군에 의해 융단폭격을 당했다. 그때 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이라크 '국방성 건물'도 폭격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문화유산도 마구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굴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도굴 당한 문화재는 미국.영국 등 전쟁 당사자들의 손으로 넘어 갔다. 4천점에 달하는 유물이 해외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또한 이라크 국립 박물관은 전쟁 때 유물을 지하로 옮겼는데 일부는 습기에 썩어 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1954년 5월 14일 '무력충돌 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협약'이란 것이 만들어졌다. '헤이그 협정'이란 것인데 인류의 문화유산인 각국의 문화재를 전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중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 99개국이 가입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와 북한 그리고 미국.영국.일본 등은 빠져 있다. 미국이 가입하지 않고 있는 것이 특히 주목된다.

전쟁은 집권자의 게임의 법칙에 의하여 결정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서 깊은 도시에서의 전쟁은 문화파괴 범죄에 해당된다. 굳이 해야할 전쟁이라면 하늘.바다.사막에서 끝냈으면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파괴된 문화를 복구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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