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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104> '오픈 시스템'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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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9년 1월 19일. 서울시청에서 구청장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한창 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비서실 직원이 시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검찰에서 행정관리국장을 체포해 갔습니다.”

 임명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김모 행정관리국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시청 사무실에서 긴급체포됐다. 2년 전 부구청장이었을 때 토지형질을 변경해 주는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 때문이라고 했다.

 머리에 날벼락이 치는 듯했다. 나는 8년여 전 수서 사건으로 부패와의 전쟁을 치렀고 결국 서울시장 직에서 물러났다. 미처 다하지 못한 숙제를 마무리해야 했다. 1998년 서울시로 돌아오며 나는 “부패와의 2차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포했다. 그 전쟁에서 야전사령관 역할을 하는 자리가 바로 행정관리국장이었다. 예전 김학재 도시계획국장을 임명할 때처럼 신중을 기했는데…. 너무 충격이 컸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1999년 10월 1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9차 국제반부패회의 총회에서 서울시의 ‘오픈 시스템’이 소개됐다. 김찬곤 당시 서울시 감사담당관(맨 왼쪽)이 부스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오픈 시스템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고건 전 총리]

 언론에서 “고건 시장이 ‘복마전을 청산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주무국장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밥맛이 사라졌다. 울화 때문에 잠을 설치던 새벽 3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이권 관련 민원을 인터넷으로 신청 받고, 진행상황 역시 인터넷으로 실시간 공개하면 어떨까.’

 다음 날인 1월 25일 간부회의를 소집해 내 구상을 밝혔다. 감사담당관실 김찬곤 감사담당관, 한문철 사무관과 정보화담당관실 이계헌 사무관 등이 컴퓨터 프로그램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그렇게 4월 15일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 시스템’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교통·건설·환경·위생 등 이권이 얽혀 있어 비리가 발생하기 쉬운 26개 분야를 선정해 우선 실시했다.

 공무원이 민원을 접수하는 시점부터 처리가 끝날 때까지 결재 단계별로 진행상황을 인터넷에 올리는 프로그램이었다. 예를 들면 건축허가를 신청한 민원인이 자신의 민원서류가 계장, 과장 또는 국장 선에 가 있는지, 앞으로 언제쯤 결재가 날 것인지, 반려가 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온라인을 통해 어디서든 볼 수 있게 했다.

 이유 없이 민원서류를 쥐고 앉아 있는 공무원이 없도록 말이다. 시청의 인맥을 동원하거나 ‘급행료’ 명목의 뇌물을 요구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 시스템은 ‘오픈(OPEN·Online Procedures Enhancement for Civil Applications) 시스템’이란 이름을 얻었다.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 등 몇몇 외국인에게 공모해 결정한 약칭이다. 서울시가 창안한 이 시스템은 각 조직의 특성에 맞게 조금씩 변형된 뒤 정부부처와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전파됐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 김찬곤 당시 서울시 감사담당관

‘햇빛은 최고 살균제’ 믿음
국제반부패회의서도 호평

서울 송파구 김찬곤(57·사진) 부구청장은 1999년 서울시 감사담당관으로 일하며 오픈 시스템의 실무를 맡았다. “‘햇빛은 최고의 살균제’라는 루이스 브랜다이스 미 대법관의 격언을 늘 되새긴다. 그의 말처럼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부패가 자리 잡을 곳은 없다”고 김 부구청장은 강조했다.

 - 이전에 없던 제도라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시청은 물론 구청마다 사용하는 행정 서류 양식과 절차가 달랐다. 심지어 과마다 다른 경우도 많았다. 공개하지 않고 업무를 처리하는 관행에 물들어 있던 시청·구청 직원들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감사담당관으로서 권한을 좀 활용했다. 특별한 사유 없이 오픈시스템에 등록하지 않는 구청이나 과 직원들에게 ‘공개 안 하면 특별감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

 - 성과는 어땠나.

 “1999년 10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제9차 국제반부패회의 총회에 참가해 오픈시스템을 우수 사례로 발표해 달라고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요청해왔다. TI의 초청을 받아 고 시장과 함께 회의에 참석했고 호평을 받았다. 감사원에서 모범 사례로 선정하기도 했고, 그해 1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공공부문 경영혁신사례로 보고됐다. 2001년 미국 타임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복마전’이라고 불리던 서울시로선 큰 진전이었다. 정말 보람 있었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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