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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거구제에선 국민 아닌 당에 충성 비례대표 강화해야 승자독식 사라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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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14면

이종찬 1936년 중국 출생. 경기고·육사 졸업. 주영 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뒤 11대 국회에 민정당 의원으로 당선. 이후 14대 국회까지 4선 의원을 지내며 민정당 사무총장·원내총무·정무1 장관을 역임했다. 김대중정부 시절 제22대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다. 현재 우당장학회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철수 명예교수가 분권형 대통령제와 연립정부 구성을 통한 정치혁신을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다. 군인과 외교관, 국회의원(4선)과 정보기관 수장을 두루 역임한 이종찬(77·사진) 전 의원을 인터뷰했다. 김 명예교수가 꿈꾸는 새 헌법 구조를 냉혹한 권력정치 현실 속에 착종시킬 방법론을 듣기 위해서다. 이 전 의원은 우리 정치에서 가장 먼저 수술할 부분으로 소선거구제를 꼽았다. 극단적인 대결정치와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선 비례대표제 강화와 다당제에 바탕한 연립정부 도입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종찬 전 의원이 말하는 정치혁신

-오랜 공직과 정치인 경험에 비춰볼 때 우리나라의 국가적 과제는 무엇인가.
“정치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와야 한다. 정치가 비전과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여야의 극단적인 대결구조가 사라져야 한다.”

-정치권에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보자. 정말 NLL이 국가적으로 중요하다면 이렇게 더럽게 싸울 일인가? 중요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정치 공방거리로 싸우는 거란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승자 독식구조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거다. 국정원 사건도 한심한 일이다.”

-국정원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국정원은 이미 국가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본연의 기능을 잘하면 된다. 사람만 잘 쓰면 아무 문제가 없다. 국정원 내에는 친여, 친야가 다 있다. 국가 안보, 즉 간첩 잡자고만 하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 그러나 국정원이 정권의 안보를 얘기하는 순간 다 새고 만다. 원세훈 전 원장은 부하들이 다 자기 사람인 줄 알았던 모양이지만, 국정원 직원들은 원장이라도 명분 없는 얘기를 하면 순종하지 않는다. 국정원은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지 정권을 위해 있는 기구가 아니다.”

-김철수 교수가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하는데.
“현행 헌법상 이미 분권형 대통령제다. 총리의 권한이 막강하다. 장관 임명제청권을 갖고 있다. 총리가 제청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 과거 정부에서 총리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아 얼마나 고전했는가. 현행 헌법하에선 동거 정부도 가능하다. 이렇게 총리의 역할이 크지만 우리 현실에선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국회기능이 강화돼야 한다. 지금처럼 국민의 존중을 받지 못하는 국회로는 대통령을 견제하지 못한다. 거물 정치인이 나와야 국회 수준이 높아진다. 그러려면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국회의원 역량이 커져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연립정부를 통한 협력적 국정운영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도 경험이 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김종필(JP) 당시 총리에게 장관 추천권을 줬다. 두 사람 다 서로 힘을 모으려 많은 노력을 했다. DJ-JP 연립정권은 IMF 외환위기를 안정감 있게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JP는 ‘DJ의 리더십은 열려 있는 리더십’이라고 직접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측근들이 잘못했다. 그 결과 양측 간에 포용의 폭이 좁아졌다. 결국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계기로 갈라서게 됐다.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다당제다. 연합을 통해 정부를 구성한다. 앞으로 한국 정치가 깊이 연구할 부분이다. 상호 연대하고 존중하는 정치가 자리 잡아야 한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제도를 맡는 인물도 중요하지 않나.
“좋은 인물들이 정당과 국회에 들어가야 정치가 바로 서는데 그렇지 못하다. 1개 지역구에서 1인만 뽑는 소선거구제 때문이다. 승자독식 구조여서 정당 보스의 공천권 위력이 커졌다. 의원들이 국민이 아니라 지도부의 눈치를 보게 됐다. 전국적으로 40%를 받아도, 의석 수가 과반이 될 수 있고 거꾸로 20%에 그칠 수도 있다. 특정 지역에선 한 정당이 40%를 득표해도 1석도 못 가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지역구도가 극심해져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정치가 된 거다. 소선거구제가 88년 도입될 때 박태준 의원과 나는 끝까지 반대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당시)이 전두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찬성했다.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도 반대하다가 어느 교수의 의견을 듣고 돌아섰다.”

-소선거구제가 지역갈등에도 영향을 미치나
“그렇다. 영남에서 진보 인사가 얼마나 당선되나? 지금은 예전보다 퇴보했다. 영남에서 민주당 당선이 어려운 건 물론 호남에서 민주당이 양보하지 않으면 진보당 후보도 당선되기 어렵다. 호남·영남에선 공천이 곧 당선이다 보니 의원들이 당 지도부에 절대 충성한다. 영호남에서 독자 출마한 인재가 40% 넘게 득표해도 줄줄이 낙선한다. 주류 정당으로 출마했으면 압도적으로 당선될 인물들이다. 너무 아깝다. 새누리당이 영남에서, 민주당이 호남에서 각각 기득권을 내려놓는 용단이 필요하다.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을까?”

-소선거구제에선 큰 인물이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다.
“일본 정치가 무력화된 이유의 하나가 소선거구제 도입이다. 한 선거구에서 3~5명을 뽑을 땐 다나카나 다케시다 등 거물 정치인이 많이 탄생했다. 오마에 겐이치는 ‘일본 정치권이 소선거구제를 도입하면서 큰 그림으로 큰 정치를 할 인물들이 사라지고 정치 졸물들이 등장했다’고 비판했다. 얼마전 일본경제단체연합도 중선거구제를 재검토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좋은 인물이 당선될 수 있는 제도를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렇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 아닌가?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지역구에선 낙선했지만 비례제도로 당선됐다. 콜이 정치의 중심에 있었기에 독일의 통일이 가능했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보수정치의 대표적 이론가다. 지역구에서 단 한 번 당선됐다. 그때 ‘여러분은 지역구가 아니라 국가의 국회의원을 뽑은 것이다’고 주장했다. 다음 선거에선 바로 낙선했다. 선거는 제도만 따질 게 아니라 국민성의 차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진국들의 선거제도는 어떤가.
“미국은 다수 대표제를 채택하지만, 유럽 국가 대부분은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혼합시스템이다. 그러니 투표율도 높다. 국민들의 복지 요구도 잘 반영된다. 국민들의 심성이 냉정한 편인 북유럽 국가들은 지역구에 소선거구제가 많다. 반면 국민들의 심성이 감성적인 남유럽 국가들은 지역구에 소선거구제가 거의 없다. 우리도 남유럽과 비슷한 감성적 투표 성향이 있다. 정치적인 쏠림 현상을 막으려면 소선거구제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 공천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우리도 무공천제를 해 본 적이 있다. 그러자 ‘내천(內薦)’이란 게 생겼다. 의원들이 자신의 정치 기반을 지키려고 여러 가지 내천 방법을 동원하고 선거운동을 했다. 무공천제는 유명무실해졌고, 결과적으로 더 문란한 공천제가 되고 말았다. 정치의 본령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국회와 국민들 간의 거리감이 더 커지고 있다.
“올바른 사람이 정치권에 들어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같은 소선거구제로는 의원들이 국민이 아니라 당에 충성하게 돼 있다. 소선거구제를 바꿔야 지역구에 매달리지 않고 국가 대사를 다룰 여유가 생긴다. 또 실력 있는 사람이 지역구에서 당선돼 당 지도부 눈치를 보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 그런 풍토 위에서 정치 거물들이 탄생한다. 결국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다느냐의 문제다.”

-방울을 달 주체는.
“여야가 합의해 정치개혁 논의기구를 큰 틀에서 만들어야 한다. 민주주의, 나아가 대한민국호가 위기를 맞았다는 인식을 갖고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지금처럼 경제가 어렵고 남북 문제가 중요해진 때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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