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 거목이 쓰러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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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라의 큰기둥이 또하나쓰러졌습니다.
불의에 용감했고 사악에 직언하는 거목이 사라졌읍니다.
정계의 원로이자 국민의지도자인 창낭의운명은 이나라의 큰 손실입니다.
이나라 정치는 당신의 그굳건한 직언이 어느때보다도 요청되는때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그굳건한 신념과 날카로운 기지는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만것입니까.
영남 거유의 혈통을타고 부유한집안에서 자라나 평생을 명랑하고 호탕한 세월을보낸 창낭.
당신은 철저한 민주주의신봉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나라의 건국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것이 아닙니까.
해방직후 그혼란했던 시국에 수도청장으로서 일조일석에 공산당의 난동을 쳐부수던 강인한 신념과 추진력을 누가 따를수 있겠읍니까.
공산당과 싸우고 이승만박사의 건국이념을 받들어 창낭은 건국에 이바지하셨습니다.
후일에 국무총리, 국회부의장을 지냈지만 창낭은 그건국공로때문에 그의 이름을 길이 빛내고있는 것입니다.
창낭은 17세때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었습니다.
그때 한국학생시학관이 한인유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의 의병봉기를 가리켜 「폭동」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왜 그것이 폭동인가』 고 대들었다가 퇴장당한일이있지않았읍니까.
그후 곧영국으로 건너갔지만 집에서 보내온 학자금을 푼푼이 모아 중형인장택상씨를 옹해 중국효산리에있는 이범석장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으니 그때부터 창낭은 정의의 투사였던 것입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에도항일독립운등을 계속하다가 청구회사건에 관련되어 당시 인촌 김성수선생과 윤치영씨등과 함께 2년동안의 옥고도치렀으니 창낭의애국심은 이미 꽃을 피우고 있었던것이 아닙니까.
이같은 애국심은 해방후에도 군정연장반대의 최선봉에 서게 됐고, 초대내각의 외무장관을 맡게 했던것입니다.
다시 돌이켜 부산에서 소위 정치파동이일어나자 이박사는 창낭을 국무총리로발탁해서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도록 책임을 지웠읍니다.
당시의 발췌개헌에 대해서는 후일에 여러가지 평가가 나오고있기는 하지만 그때의 난세를 건진 창낭의 공로만큼은 인정하지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시기에 등용된것은 창낭의 지도력이 뛰어났기때문이 아니겠읍니까.
미군정에 이박사와「하지」군정장관의 심한반목을 중간에서 번뜩이는 기지와 정치력량으로 해소시켜 건국에 크낙큰 구실을 한 것은 이미 알려진이야기지만 창낭의 그 지혜와 정치적형안은 역사에 남을것입니다.
괄괄하고 성급함 때문에 때론 오해도 많이 받았었지만 어제까지의 정적을 금방 동지로 받아들이던 넓은 도량이 새삼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시고없는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큰 유산은 청빈과 그리고 애국심입니다.
요새는 정치를하면 치부를 한다고들 하는데 창낭은 정치를하면서도 서울수표동집을 팔고 영등포 대방동조그만 집에 유가족을 남기시지않았읍니까.
운명하기 3일전 창낭은 나라 일을 몹시 걱정했읍니다.
이제 창낭온 갔지만 망신의 청빈과 애국심은 역사의 교훈으로 길이 빛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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