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행정협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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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소련의 「브래즈네프」와 미국의 「존슨」, 그리고 「체코」의 「두브체크」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 문턱에 이르자 하느님이 그들의 마지막 소원이 뭣이냐고 물었다.
「브레즈네프」는 『미국인을 전부 죽여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존슨」은 『소련인을 전부 죽여주십시오』하였다. 그러자 「두브체크」는 『이젠 제게는 아무 소원도 없읍니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체코」에서 유행하던 만담의 한 토막이다. 「체코」사람들의 몸부림은 반 소 적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친미적인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체코」의 자유화운동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거의 모든 나라에서 중공이나 소련 다음으로 환영을 그리 받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미국이 그처럼 막대한 원조를 후진국개발에 아끼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있다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뜻밖의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 『조용한 미국인』에서 「그레이엄·그린」은 동남아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미국인 주인공의 이상주의적 꿈이 비극을 가져온다고 날카롭게 풍자한 적이 있다.
이밖에도 너무 잘사는 이웃에 대한 열등 「콤플렉스」도 있겠고, 너무 「달러」냄새를 풍기는 배금주의 적 행동도 그들이 미움을 받게되는 까닭의 하나인지 모른다.
가령 「프랑스」에서 영어 아닌 미국어를 쓰면 푸대접받기가 일쑤다. 최근에 「록펠러」「뉴요크」지사가 중남미친선여행 중에 받았던 대접도 비슷한 까닭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면, 한국은 『양키·고홈』의 소리가 단 한번도 들리지 않은 유일한 나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사대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은 아니다. 6·25때의 은혜를 잊지 못하기 때문에서 만도 아니다.
4·19의 유혈 적 「데모」로 백열화 한 거리를 미국대사가 호위차 없이 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인과 미국사이의 끊을 수 없는 친밀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오늘로써 한미행정협정이 조인된 지 꼭 3년이 되다. 그것은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의 보다 긴밀한 유대를 기약한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68년에 있었던 재한 미국인의 총 범죄건수 1천 7백여건 중에서 한국 측이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76건밖에 안 된다. 어디에 잘못이 있든 간에 이런 「언·밸런스」에서 도리어 양국사이에 틈새가 생긴다면 그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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