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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공포와 죽음의 17개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베트콩」 3명을 때려누이고 탈출에 성공한 우리는 엎어졌다가는 일어서고 걷다가는 또 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10시간쯤 전진했을까, 지겹던 「정글」이 끝나면서 멀리 마을하나가 보였다.
어딘지 평온한 마을모습으로 보아 월남땅이 아닌것이 분명해졌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무렵 우리는 국경선을 훨씬넘어 「캄보디아」의 「프레이벵」성안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베트콩」의 굴레에 갇혔던것 못지않게 새로운 공포에젖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캄보디아」를 친공산중립국으로만 인식해왔던 우리는 「캄보디아」사람에게 잡히는경우 틀림없이 북괴측에 넘겨질줄 믿었기때문이다. 『 그렇다면 탈출도 허사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무렵 어느틈에 숲속에서 우리를 발견한 민간인 수명이 차차 다가 오고 있는게 아닌가. 이를 재빨리 본 박정환 소위가 『?형 큰일났소. 뜁시다』하고 소리쳤으나 그때나는 이미 기진맥진하여 한발짝도 더 옮길수 없었다. 나는 그만 그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캄보디아」사람들이 수상한나를에워싸고 붙잡아 일으켰을 때 박소위는 이미 멀찌감치 달아난 뒤였다.
나는 그들에게끌려 가까운 경찰지서에 넘겨졌다.
재빨리 달아난줄 알았던 박소위도 나보다 1시간 늦은 정오쯤 6km가량 떨어진 곳에서 하는수없이 붙잡혀와 또 같은 신세를 겪게됐다.
경찰들은 우리를 간첩으로 마구 몰았으나 우리는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나섰다. 그곳에서의 고생은 가장 참기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었다. 내건강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져 그대로 눈을 감으면 지쳐 쓰러져 죽어버릴것만 같았다. 「베트콩」 에 맞은 발목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아 고통이 한층 더 심했고 옆구리가 쑤시고 아팠다.
게다가 「캄보디아」의 모기와 빈대는 살점을 뜯어먹는듯한 독기를 풍겨 가려움과 고통에 밤이면 잠을 이룰수가 없을지경이 었다.
「프레이벵」에서 일단조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이송되어 군형무소에 수용되었다. 그곳엔 외국인으로는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인·월남인·태국인·「라오스」등 5개국 사람들이 한데어울려 갖가지 죄목으로 수용되어 있었다.
「프놈펜」에와서부터는 조금 고생이 덜했다. 형무소에서는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수 있었으며 아침엔 빵, 점심·저녁은밥에 소금국을 주었으나 「정글」에서 시달릴때보다는 훨씬몸이 편했다. 나는 주로 변소를 청소하는 작업을 맡았으며 가끔 환경정리를 하는 노역에동원되기도했다.
「캄보디아」에 역류된지 만8개윌만인 11월19일 우리는 드디어 간첩죄란 누명의 군사재판을 받게되었다. 그날 박소위와 나는 수갑을 찬채 다른 외국인죄수 13명과함께 법정에 들어섰는데 우리들에 대한 이른바 「간첩사건」은 너무나 엉터리 재판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군재는 우리에게 『미군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공소사실을 그대로인정, 불과 15분만의 날치기 재판을통해 징역6년을 선고하는게 아닌가. 순간나는 앞이 캄캄해지며 아찔 했다. 수만리 이역에서 6년 징역을 치를 것을 생각하니 아무리 참으려해도 북받치는 설움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벅차 눈물부터 쏟아져나왔다. 나는 의자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말았다. 국의 어머니와 처자식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잃지 않았다. 특히 박소위는 아침 빵을 먹지않고 다른 죄수들에게 팔아서 산 편지지로 「시아누크」주석, 국제적십자사총재, 「유엔」사무총장등 닥치는대로 관계요루에 석방을 호소하는 편지를 냈다.
드디어 우리에게 광명이 찾아왔다. 지난6월4일 소장은 우리를 불러 「시아누크」공이 특사를 해줄것이라는 운을 띠어 주었다. 우리는 서로 껴안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쁨에 겨워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헤맨지 17개월 「캄보디아」에서 풀려나온 우리가 태국 「방콕」 의 우리대사관뜰 잔디밭 국기게양대에 자랑스러운 듯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았을때의 그감격-그태극기의 모습은 목숨이있는한 잊을수없을것같다.
끝으로 우리를 조국의 품에 다시 안기게 해준 국민 여러분과 관계당국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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