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울지 마라, 그만하면 지는 것도 아름답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축구 청소년대표팀 주장 이창근(왼쪽)이 8일 이라크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이광훈을 위로하고 있다. 이번 대표팀은 스타는 없지만 한마음으로 뭉쳐 8강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때론 패배가 승리보다 더 큰 감동과 울림을 준다. 8일 터키 카이세리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2013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8강전이 그랬다. 전·후반 2-2로 비겼고, 연장전에 1골씩 주고받은 뒤 한국은 승부차기에서 이라크에 4-5로 패했다. 숫자만 보면 난타전 끝에 승부차기로 아쉽게 패한 경기 정도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FIFA 홈페이지는 이 경기를 두고 “U-20 역사상 가장 놀라운 클라이맥스”라고 극찬했다.

체력 바닥난 연장 후반 버저비터 기적

 2-2로 연장전에 접어들었다. 한국과 이라크 모두 16강전에 이어 2경기 연속 치르는 연장이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던 연장 후반 종료 2분 전 한국은 골을 허용했다. 새벽까지 TV를 지켜보던 축구팬도, 목청을 높여 경기를 중계하던 방송 해설자도 패배를 예감하며 절망에 휩싸였다. 그러나 ‘젊은 호랑이’들은 침착하게 다시 시작했다. 연장 후반 15분, 이광종(49) 감독은 골을 넣은 권창훈(수원)을 빼고 이번 대회 한 번도 출전하지 않은 수비수 정현철(동국대)을 투입했다.

 그리고 이미 전광판 시계가 멈춘 시간, 기적 같은 동점골이 터졌다. 아크 정면에서 공을 잡은 정현철이 오른발 슛을 때렸다. 공은 상대 수비수의 머리를 살짝 맞고 골문 오른쪽 상단에 꽂혔다. 농구의 버저비터 골(종료 버저와 동시에 터진 골)이 축구에서 나온 셈이다. 승부차기마저 숨 막혔다. 5명씩의 키커가 4-4로 경기를 마친 후 6번째 키커에서 희비가 엇갈려 한국은 4-5로 패했다. 태극 전사들은 경기장에 엎드려 굵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본 많은 팬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진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했다. 유영운(43)씨는 “비록 졌지만 멋진 승부였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루고도 졸전을 펼쳤던 국가대표 경기보다 훨씬 낫다. 이런 경기를 더 못 본다는 게 아쉬울 뿐”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표팀을 축구계에서는 ‘골짜기 세대’라고 부른다. 우뚝 솟은 스타는 없고 깊게 파인 골짜기 같은 B급 선수만 모였다는 비아냥이다. 1999년 나이지리아 대회 땐 이동국·설기현·송종국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2005년 네덜란드 대회 땐 박주영·이근호, 2007년 캐나다엔 이청용·기성용이 있었다. 이번 대표팀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선수가 없다.

팬 “이런 경기 더 못 보게 된 게 아쉬워”

이광종 감독은 내성적이라 말이 별로 없지만 경기를 지휘할 때는 맹장으로 돌변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상자도 속출했다. 지난해 19세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할 때 주축 공격수로 활약한 문창진(포항)과 김승준(숭실대)이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우리 팀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기회를 잡은 류승우(중앙대)가 조별리그 1, 2차전에서 잇따라 골을 터트렸다. 류승우마저 3차전에서 부상으로 빠지자, 권창훈이 훌륭하게 빈자리를 메웠다.

 이 감독은 이름값 높은 선수 한두 명에 의존한 게 아니라 조직력을 중시하며 팀을 만들었다. 팀 정신도 남달랐다. 경기에 나서는 베스트 11은 물론 벤치를 지키는 선수와 부상 선수들까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후보라고 뒷짐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제 기회를 얻더라도 제 몫을 하겠다는 각오로 준비하고 있었기에 부상자가 속출해도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감독은 “스타가 없다고 하는데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잘하는 선수보다는 팀을 위해 희생하는 선수를 쓰겠다”고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고, 희생을 강조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덕진 경기력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한국은 쿠바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선제골을 허용한 뒤 역전승을 거뒀다. 포트루갈과 2차전에서는 0-1에서 1-1, 1-2에서 2-2로 무승부를 만들었다. 이라크 전에서도 먼저 실점을 한 뒤 1-1, 2-2로 끈질기게 한 골씩 따라붙어 결국 3-3까지 갔다.

 한국 축구는 2000년 초반부터 권역별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유망주들을 발굴해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이광종 감독은 유소년 육성 시스템 시작 때부터 함께한 지도자다. 12·15·17·19·20세 등 거의 모든 청소년 연령대를 지도하며 경험을 쌓았다. 2011년 콜롬비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도 16강을 일궈냈다. 지난해 19세 아시아선수권에서는 이라크를 승부차기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교체 투입한 선수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골을 터뜨리는 ‘신출귀몰 용병술’은 청소년 선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풍부한 경험 덕분이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 없다” … 형들과 달라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성인 대표팀은 졸전과 불화의 진흙탕을 걸었다. 형들이 남긴 흉한 발자국을 아우들이 말끔하게 지워냈다. 축구팬들은 “홍명보 감독이 하겠다는 ‘한국형 축구’를 청소년 대표가 미리 보여주고 있다”며 찬사를 보낸다.

 U-20팀의 골키퍼 이창근(부산)은 이라크전을 앞두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썼다. 아름다운 정신이 아름다운 경기를 만들었다.

이해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