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읽는다] 100년 후 다시 펼쳐진 한중일 삼국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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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읽는다] 100년후 다시 펼쳐지는 삼국지
양이보다 존왕 택했던 일본, 반대였던 한·중…문화 코드로 재해석한 한·중·일

『한·중·일 삼국지 문화』
유주열 저
현학사, 268p, 12,000원

#1. 일본은 중국을 ‘시나(支那)’라고 부른다. 시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왔다. 인도 승려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스트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처음 쓰였다. 인도에서는 티베트 동쪽의 중국을 ‘신(Cin)’으로 불렀다. 진(秦) 왕조가 유래다. ‘시나’는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갔다. ‘차이나(China)’의 유래다. 중국학을 ‘시노로지(sinology)’라 부르는 것도 ‘시나’가 중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신 중국에는 서양식의 국가개념이 없었다. 왕조가 국가를 대신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건국됐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중국’, ‘중국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6세기에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된 불경이 일본에 전파됐다. 일본은 ‘시나’가 중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았다. 17세기 네덜란드인에 의해 서양의 인문지리서가 전해졌다. 서양도 중국을 ‘시나’로 부름을 알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 선도 국가로 유럽과 자신을 동일시 했다. 일본이 중국을 시나로 부른 이유다. 보통 사람의 이름은 부모가 짓는다. 자기보다 타인이 더 자주 사용한다. 중국과 China(시나)란 이름에서부터 중국과 서구, 일본의 관점은 충돌한다.(‘중국과 시나’, p.124~126)

#2.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청제국의 광서제, 일본의 메이지 천황이 다스린 세 나라는 모두 유교국가였다. 송(宋)나라에서 유래한 존왕양이(尊王攘夷) 정신으로 서양에 맞섰다. 일본은 양이보다 존왕을 강조했다. 존왕파는 막부세력을 물리치고 존왕에 성공했다. 메이지유신이다. 존왕파는 양이가 무모함을 깨달았다. 친이로 구미열강의 근대기술을 빨리 배우는 것이 ‘더 큰 양이(大攘夷)’라고 생각했다.
중화와 사대로 무장한 중국과 조선은 서양인 배척에 힘썼다. 멸양을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실리보다 명분에 집착했다. 그 결과 근대화에 한발 늦었다.
승자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배로 성취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100년 전 실패는 한국과 중국에게 재기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한·중·일 삼국지는 지금 다시 시작되고 있다. (‘황제삼국지’, p.183~193)

위 두 이야기는 중국과 일본에서 9년, 6년 동안 근무 경력을 갖고 있는 유주열 전 홍콩 총영사가 최근 출판한 『한·중·일 삼국지 문화』에 실린 내용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한국, 중국, 일본은 시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중심에 문화가 있다.
저자가 이책을 집필한 이유는 부친의 한마디 때문이다. “너는 어릴 때부터 국공립학교에 다니며 저렴한 학비로 공부했다. 공직자가 되고 나서도 나라 돈으로 미국 사립대에서 공부했다. 이제 정년퇴직을 했으니 그 동안 경험하고 배운 지식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
유주열 총영사의 연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의 ‘지식나눔 플랫폼’인 ‘백가쟁명’에서 지금도 연재중이다(http://china.joins.com/portal/series.do?method=detaillist&P_Sid=5823).

신경진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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