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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반도체 업계, ‘투자 효율 역설’로 일본 따돌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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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23면

1980년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내부 모습.[중앙포토]

#1 “앞으로 3~5년 뒤 세계 D램 시장에는 3개 업체만 살아남을 것이다.”
2005년 2월, 일본 반도체 기업인 엘피다의 유키오 사카모토 최고경영자(CEO)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키오 사장은 또 “엘피다가 그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7년 뒤인 지난해 2월, 엘피다는 약 5조2000억원의 빚을 안고 파산했다. ‘극소수만 살아남는다’는 유키오 사장의 예언은 정확히 맞았다. 승자를 예측하지 못했을 뿐.

보스턴컨설팅그룹이 들려주는 경영의 한 수 <1> 반도체 산업서 배우는 '투자 효율'

#2 올 1분기에 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SK하이닉스의 신용등급을 기존 BB-에서 BB로 한 등급 올렸다. 금융시장에서는 이를 ‘D램 반도체 치킨게임의 공식 종언’이라고 받아들였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대호황이다. 지난해 11월 말 0.8달러 하던 일반 D램 가격이 6월에는 1.563달러가 됐다. 일곱 달 만에 약 두 배로 뛴 것이다. 이 덕분에 메모리 반도체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2위 SK하이닉스는 올해 기록적인 실적을 낼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 한국 반도체 기업이 누리는 ‘좋은 시절’은 지난 10여 년 동안 뿌렸던 씨앗의 결실이다. 15년 전 반도체 종주국은 일본이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 반도체 산업의 패권을 미국으로부터 빼앗아 와 2000년대 초까지 시장을 주도했다. NEC·히타치·도시바·파나소닉 등이 1980년대 초 ‘반도체 글로벌 톱10’ 기업이었다. 한때 세계 D램의 75%를 일본 기업이 만들었다.
하지만 엘피다 파산이 상징하듯 이제 일본 반도체 산업은 몰락했고 한국이 패권을 가져왔다. 지난 10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0년대 이후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 기업에 밀리자 일본 기업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기술은 우리가 앞선다. 다만 삼성전자의 과감한 설비 투자에 밀릴 뿐”이라는 궁색한 이 변명 안에 해답이 있다.

성공하는 빵집, 실패하는 빵집
투자 효율은 ‘자원을 투입해 얼마나 많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가’다. 모든 경영자는 되도록 적은 ‘인풋(input)’으로 최대한 많은 ‘아웃풋(output)’을 거두려 하고, 이때 ‘투자 효율이 높다’고 말한다. 이때 자원은 돈뿐만이 아니라 시간과 사람도 포함된다.

투자 효율을 높이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적합한’ 자원을 ‘충분하고 꾸준하게’ 투입해야 한다. 둘째, 트렌드에 맞는 상품이 나오게 해야 한다. 셋째, 핵심 역량에 자원이 투입돼야 한다. 편의상 이를 ‘투자 효율의 3대 원칙’이라고 부르자. 사실 상식적이고도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막상 내 사업이 되면 그리 쉽지 않다. 여기 홍길동씨가 경영하는 ‘S빵집’과 이몽룡씨의 ‘F베이커리’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창업자금 1억원으로 빵집을 열었는데, 준비 과정은 전혀 달랐다.

S빵집 홍 사장은 시간과 노력을 솜씨 좋은 제빵사 구하는 데 집중적으로 썼다. 천신만고 끝에 적임자를 찾자 과감히 높은 보수를 제시했다. 빵 시장은 생크림 케이크, 와플, 천연 발효 빵 등으로 빠르게 변했다. 홍 사장은 유행 시작 단계에 재빨리 동참했고, 물리기 전 거둬들였다. 개업 후 1년간은 적자를 각오하고 자금 계획을 짰다.

F베이커리 이 사장은 창업자금의 대부분을 프랜차이즈 가맹에 사용했다. 이 사장에게는 ‘투자=돈’이었다. 최신 와플 기계를 들여 놓고는 ‘어떻게 하면 기계를 최대한 돌려 기계 값 이상의 수익을 뽑을까’만 생각했다. 작은 효율에만 집중하고 변하는 고객 입맛에는 무심했다. 그는 방문 고객 숫자와 금전출납기의 돈만 셌다. 한 달이 지나자 초조해졌다. 6개월 뒤에도 수익이 나지 않자 결국 ‘문을 닫자’는 결론을 내린다.
투자 효율의 3대 원칙을 기준으로 보면 동네 빵집의 성공과 실패 요인은 명확하다. 빵집의 핵심 역량은 맛과 신선도다. 설비를 갖추든 제빵사를 고용하든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실패하는 빵집은 오븐으로 한 시간에 몇 개의 빵을 구워낼 것인가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공격 투자
최근 10여 년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성공한 S빵집처럼 운영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 곡선을 그리는 산업이다. 이 곡선의 변곡점마다 반도체 산업은 중대한 전환기를 맞곤 했다. 그중의 한 장면, 2006년 불황기. 그해 세계 반도체 업체들은 설비투자 확대 경쟁에 바빴다. 곧 공급이 넘치게 됐고, 2008년 D램 가격은 반토막이 났다. 2009년 1분기가 되자 후발 대만 업체들의 적자가 매출액과 맞먹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하는 수 없이 대부분의 업체는 투자를 기존의 절반으로 줄인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2007년과 2008년 각각 약 7조원을 주로 반도체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하는 미세공정에 쏟아 부었다. 후발 업체가 못 견디고 손을 들면 시장을 장악, 수익을 내겠다는 ‘치킨 게임’을 주도한 것이다. 투자 성과로 삼성전자는 2009년 세계 최초로 40나노급 2기가비트(Gb) D램을 양산했다. 이어 2010년에는 30나노 공정을 개발하는 등 앞서 가게 됐다. 자금력과 인력 규모에서 삼성전자를 넘어서기 어려웠던 SK하이닉스 또한 특유의 승부근성을 발휘해 경쟁사들을 따돌렸다. 탄탄한 기술력과 시장 지배적 공급량을 갖춘 지금, HP·델·애플 등 반도체 고객은 이 두 회사 제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두 회사는 의사 결정도 빨랐다. 메모리 반도체는 미세공정 전환에 걸리는 한 달의 시간차가 기업의 생사를 가르기도 한다. 이들은 시간이라는 자원이 경쟁우위의 원천임을 꿰뚫어 봤다.

밤낮없이 일하는 기업문화와 오너 경영 체제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주주 중심으로 경영되는 미국 등의 경쟁 업체는 분기마다 주주에게 투자 내역을 밝히고, 경영 성과와 비교해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구조였다. 이 때문에 장기적인 시각의 투자가 어려웠다.

자원은 핵심 역량에 제대로 쓰였다. 좋은 빵 맛을 내는 핵심 역량은 반죽과 발효과정이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미세공정이 이에 해당한다. 같은 크기의 웨이퍼에 더 많은 것을 그려내는 미세공정 기술력이 높아지면 가격 경쟁력이 생긴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미세공정 기술에 집중 투자하는 동안 경쟁자들은 인수합병(M&A)을 통한 덩치를 키웠다. 1999년 NEC와 히타치의 D램 부분을 합병해 탄생한 엘피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사이즈는 핵심이 아니었다.

‘효율’이라는 말의 함정
사람들의 입맛이 변하듯 반도체 시장도 빠르게 변한다. 2000년대 반도체 시장의 흐름은 D램에서 낸드로 바뀌고 있었다. 한국 기업이 재빨리 이 흐름에 올라탄 반면 대만계 반도체 기업은 한발 늦었다. 이미 PC용 D램에 투자를 많이 한 것에 집착했다. 이미 투자된 분야에서 최대치를 뽑아내야 주주를 설득할 수 있었다.
흔히 ‘투자 효율’이라는 말 자체가 ‘들어간 돈 대비 얼마를 뽑아내느냐’라는 단순 이해득실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적잖은 경영자들이 이런 ‘효율’이라는 단어의 함정에 빠지는 이유다.
하지만 지금 한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누리는 호황 사례는 작은 효율, 단순 효율이 투자 효율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준다. 현명한 경영자는 ‘효율’이라는 단어 안에 묵직함, 때로는 배짱, 핵심 역량을 가려내는 통찰력, 끈기 등이 들어 있음을 안다.

다만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영원히 통하지는 않는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한정된 실리콘 웨이퍼에서 최대한 많은 칩을 만들어 내는 전공정(fabrication)에 대한 기술력 투자 게임은 거의 끝이 났다. 반도체 칩을 가능한 한 작게 만들고 최소한의 전력으로 작동하게 포장하는 후공정(packaging)으로 기술의 승부처가 이동하고 있다. 그 다음 무대는 비메모리 시장이다. 삼성이 시스템 LSI(대규모 집적회로)사업에서 좋은 성과를 냈지만 시작에 불과하다. 메모리에서 승자가 된 한국 반도체 기업은 또 다른 게임의 룰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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