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이그, 공격 물꼬…다저스 '괴물 듀오' 승리 합작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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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류현진(왼쪽)이 6일(한국시간) 샌프란시코에서 열린 원정경기에서 7회초 2점 홈런을 치고 홈으로 돌아오는 동료 후안 유리베(가운데)를 축하하고 있다. (작은 사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타선을 상대로 역투하고 있는 류현진.

미국 프로야구 류현진(26·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이 6일(한국시간) AT&T파크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원정경기에서 시즌 7승(3패) 달성에 성공했다. 6과3분의2이닝 동안 4피안타·2실점으로 호투한 그는 지난해 월드시리즈 챔피언이자 자신에게 2패를 안겼던 샌프란시스코를 완벽하게 제압했다. 평균자책점은 2.82로 낮아졌다.

 류현진은 3회초 1사 3루에서 1타점 우전안타를 때려내는 등 타석에서도 활약했다. 낯선 한국인 투수를 향했던 미국인들의 우려는 이제 싹 걷혔다. 정확한 제구, 다양한 구종, 영리한 공배합, 그리고 타격 능력까지 뽐내는 류현진은 메이저리그 데뷔 3개월 만에 정상급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다저스 타선은 이날도 뜨거웠다. 쿠바 출신 야시엘 푸이그(23)가 2-1이던 3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2루타를 치고 나갔다. 푸이그가 포문을 연 3회 다저스는 6점을 추가하며 사실상 승부를 끝냈다. 10-2로 이긴 다저스는 내서녈리그 서부지구 3위(41승44패)를 달리고 있다.
5월까지 지구 최하위(5위)에서 허덕였던 다저스는 류현진의 꾸준한 투구와 푸이그의 맹타를 동력 삼아 놀라운 상승세를 타고 있다.
 
양키스 “우린 승리자” 다저스 “우린 선구자”
다저스가 발간한 2013년 가이드북의 국제교류 페이지엔 류현진이 다저스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전설적 농구스타이자 다저스의 공동 구단주인 매직 존슨(54)이 그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지난해 12월 류현진의 다저스 입단식 사진이다. 다저스는 6년 총액 3600만 달러(약 400억원)를 주고 류현진과 계약했다.

 푸이그는 지난달 4일 메이저리그에 올라와 한 달 동안 타율 0.436, 홈런 7개, 타점 16개를 올렸다. 푸이그는 사상 최초로 내셔널리그 이달의 선수상과 최고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쿠바에서 망명해 멕시코에서 뛰고있던 푸이그를 잡기 위해 다저스는 7년 총액 4200만 달러(약 470억원)를 투자했다.

 계약 시점엔 비관적인 시선이 많았다. 미국 무대에서 검증받지 못한 선수들을 다저스가 너무 비싸게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괴물은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다저스의 주축 선수가 됐다.

 야구의 세계화는 다저스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다. 세계 시장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해 그들을 미국 시장에 선보인다. 더 많은 사람이 야구를, 특히 다저스를 좋아하고 소비하도록 하는 게 다저스 야구가 꿈꾸는 자유주의다. 뉴욕 양키스가 미국의 보수층을 상징한다면, 다저스는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팀이다.

 1883년 창단한 브루클린 애틀랜틱스의 연고지는 뉴욕이었다. 1958년 로스앤젤레스(LA)로 연고지를 이동해 오늘날의 다저스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교역도시 LA에서 다저스는 세계화 전략을 펼쳤다.

 브루클린 시절 다저스는 함께 뉴욕 연고를 쓰는 양키스의 인기에 밀렸다. 대신 다저스는 훨씬 유연하고 진취적이었다. 메이저리그 전문가 송재우 JTBC 해설위원은 “양키스는 ‘우린 승리자’라고 자랑하고, 다저스는 ‘우린 선구자’라고 믿는다. 서부 연고지 이동과 팜시스템(Farm system·마이너리그 선수 육성), 해외시장 개척 등 메이저리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모두 다저스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1947년 다저스의 개막전 1루수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이었다. 흑인 경멸이 당연했던 시절, 다저스 선수들은 로빈슨과 함께 뛸 수 없다며 경영진을 찾아갔다. 몇몇 팬은 로빈슨에게 살해 협박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월터 오말리 다저스 구단주는 모두의 반대를 뚫고 로빈슨을 영입했다. 니그로(흑인)리그에서 최고의 실력을 뽐냈고, 학식과 인품까지 갖춘 로빈슨이라면 야구의 인종차별을 이겨낼 선구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로빈슨은 그해 타율 0.297, 도루 29개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올랐고, 다저스는 6년 만에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로빈슨은 6차례나 올스타에 선정됐고, 49년엔 최우수선수에 올랐다. 흑인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건 당연했다. 로빈슨으로 인해 다른 흑인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었고, 인종차별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72년 사망한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이 그의 등번호 42번을 영구결번했다. 다저스가 앞장서지 않았다면 흑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국경 초월한 ‘다국적군’ 다저스
1970년 월터의 아들 피터 오말리가 다저스 경영권을 승계한 뒤 본격적인 세계화 정책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면 아들은 국경을 넘었다. 다저스는 중남미와 호주·아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왼손투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53)는 다저스가 발굴한 대표적인 히트상품이다. 멕시칸리그 출신 발렌수엘라는 80년 다저스에서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8차례 완봉승을 포함해 13승7패 평균자책점 2.48을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신인왕과 사이영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위력적인 스크루볼을 던졌던 발렌수엘라는 6차례 올스타에 선정됐고, 통산 141승을 거뒀다. 다저스는 발렌수엘라 덕분에 81년 월드시리즈 우승과 많은 중남미 팬을 함께 얻었다.

 1990년대 다저스는 아시아 열풍을 선도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40)가 94년 다저스와 계약했고, 이듬해 일본인 최고 투수 노모 히데오(45)가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노모는 95년 13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했다.
 
마이너리그를 거친 박찬호는 96년 빅리그 무대를 밟았고 2001년까지 다저스의 에이스급 투수로 활약했다. 박찬호와 노모가 빅리그에서 성공하자 한국·일본 선수들의 미국행이 이어졌다. 둘이 함께 활약했던 시절 LA지역의 많은 아시아인은 다저스에 열광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저스는 아시아에서 상당한 중계권료와 마케팅 수익을 올렸다. 경제위기로 신음하던 한국인들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거인들을 삼진으로 잡아내는 장면을 TV로 지켜 보며 열광했다. 웬만한 젊은이들이 다저스 선수들의 이름과 경력을 줄줄 외울 만큼 국내에서 다저스 인기는 꽤 높았다. 유대인 엘리트 숀 그린(41)도 그중 하나였다. 대만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천진펑(36)도 98년 다저스에서 데뷔했다.

 다저스의 세계화 전략은 선수 스카우트에만 그치지 않았다. 도미니카공화국에 야구학교를 처음 세웠고, 야구 불모지 중국·러시아에 야구장을 만들었다. 야구가 84년 LA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자 다저스타디움을 열어줬다. 또 다저스는 일본 요미우리와 한국 삼성을 그들의 베로비치 캠프에 초청하며 활발하게 교류했다.

 수십 년째 이어온 노력 덕분에 다저스가 얻은 유무형의 수익은 상당하다. 오말리 부자(父子) 이후 구단주가 몇 차례 바뀌었지만 다저스의 세계화 전략만큼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도 다저스는 곳곳에서 세계화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 세계와 교류하면서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라는 야구를 세계에 되파는 것이 다저웨이(Dodger way)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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