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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뺨치는 정권 끝났다" vs "죽음으로 대통령 지킬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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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일(현지시간) 군부의 무르시 대통령 축출에 환호하는 시위대가 모인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상공을 이집트 군 헬기들이 비행하고 있다. 군부가 무르시 축출에 이어 무슬림형제단 지도부 200여 명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자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져 10여 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로이터=뉴스1]
이상언 특파원

5일 낮 이집트 카이로 도심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나스르 시티. 히잡을 쓴 여성이 길 한복판에서 울부짖듯 “알라”라고 외치며 “우리 대통령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전통 이슬람 복장을 하고 수염을 기른 남성은 옆에서 “우리는 죽음으로 대통령을 지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이 말하는 대통령이란 불과 이틀 전까지 이집트를 이끌던 무슬림형제단 소속의 무함마드 무르시다. 이집트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던 그가 민심을 등에 업은 군부에 의해 축출되자 무르시 지지자들은 나스르 시티에 모여들었다. 정오가 되기 전 이슬람 사원 앞 중앙대로에 1만여 명이 모여들어 금요기도회를 열고 “무르시만이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구호를 외쳤다. 현장에서 만난 무스타파 카신(42·변호사)은 “나는 무슬림형제단 소속은 아니지만 무르시가 대통령 자리로 복귀할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친무르시 시위대는 이방에서 온 기자를 반겼다. 그들은 “(군부가 장악한) 이집트 언론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다뤄주지 않는다”며 집회 소식을 널리 알려 달라며 카메라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날 이집트 곳곳에서 수만 명이 참가한 무르시 지지 집회가 벌어졌다. 무슬림형제단은 ‘거부의 금요일(Friday of Rejection)’이라고 명명했다. 이날 무르시가 한때 억류됐던 군부건물을 향해 행진하던 시위대 수백 명에게 경계 병력이 발포해 최소 3명이 숨졌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이집트 군부는 이슬람 반군의 공격이 벌어진 남부 시나이와 수에즈에 대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무르시를 비롯한 무슬림형제단 지도부의 상당수가 군부에 의해 체포됐고 곧 기소될 예정이다. 무르시 지지자들이 집결한 나스르 시티와 카이로 도심을 연결하는 도로 연변에는 군이 물샐 틈 없는 경계를 펼치고 있다. 장갑차가 줄지어 섰고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집회 현장 인근의 군 시설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카이로 도심으로 들어오자 상반된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군중으로 가득 찼던 타흐리르 광장은 평온을 되찾았다. 무바라크 독재 뺨치던 무르시의 실정이 이제야 끝났다며 환호하는 이들도 쉽게 만나볼 수 있었다. 무르시 집권 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이 서민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정전이 일어났고 연료 부족으로 주유소에 200~300m씩 차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현금 보유액 부족으로 빈곤층의 밥줄이었던 빵 보조금에까지 영향을 미칠 지경이 됐다. 시민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다. 택시 기사 알리 호스니(37)는 “(무르시가 쫓겨난 뒤로는) 주유소의 줄도 많이 줄고 전기가 나가는 일도 거의 없다”며 좋아했다. 군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닌데도 시민들은 이런 우연을 무르시 축출과 은연중 연결시키고 있었다. 한식당을 운영하는 교민 이은주(42)씨는 “무르시 집권 이후 사회 불안이 계속되면서 관광객도 줄며 생활이 팍팍해진 것이 사실”이라며 “우리 식당에서 일하는 이집트인 종업원들은 저녁만 되면 타흐리르 광장에 가서 늦도록 무르시 퇴출을 축하하더라”고 전했다.

 이번 사태가 쿠데타인지 민중혁명인지에 대해서는 묻는 사람마다 의견이 달랐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같은 현상’을 ‘같은 의미’로 볼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집트 전역에서는 계속해서 유혈 충돌 소식이 들려왔다. 나일 삼각주에 있는 무르시의 고향 자가지그에서는 4일 오토바이를 탄 남성들이 무르시 지지자들을 습격해 난투극이 벌어져 80명이 다쳤다. 국영방송은 4일 하루에만 최소 2명이 숨지고 100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야권 연합 대표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는 뉴욕타임스·CNN 등 미국 주요 언론과의 잇따른 인터뷰에서 군부 개입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밝혔다.

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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