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상생 퍼즐의 완성 … 가게도 차려 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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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4일 오후 1시30분 서울 중구 서린동 SK빌딩 뒤편. 청계천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차가 멈춰 섰다. 평소에 없던 이동식 물품 판매점이 생겼기 때문이다. 경찰은 건축 허가 여부를 확인하더니 판매점 용도에 대해 물었다. 이 판매점은 사회적기업과 장애인 디자이너가 만든 물품을 파는 이동식 ‘팝업 스토어’였다. 가로 3m, 세로 6m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 만들었다. 관계자의 설명을 들은 경찰은 휴대전화 케이스를 하나 산 후 “수고하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판매점을 운영하는 권소현 강남장애인복지관 지역복지팀장은 “지금까지는 물건을 복지시설 등에서 판매했기 때문에 소비자가 찾아오기 어려웠다”며 “도심에 이런 판매점이 생기니 소비자들이 선입견 없이 제품 디자인을 보고 지갑을 연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부터 개설된 이 판매점에는 하루 300~400명이 들르고 있다. 하루 최대 150만원까지 매출도 올렸다. 5일까지 이곳에서 판매를 한 후 강남 등으로 장소를 옮기며 판매할 예정이다. 판매점 설치와 비용 후원을 한 SK이노베이션의 차명관 사회공헌팀장은 “지금까지는 사회적기업 육성에 초점이 있었다면 이제는 판로 확대로 지원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첫 시도”라고 말했다.

 기업의 상생 활동이 진화하고 있다. 거창하지 않지만 18㎡의 작은 공간을 통해 사회적기업의 제품 제조 지원에서 판매 확대로 영역을 넓혀가는 식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이날 동반성장의 폭을 사회공헌활동까지 확대했다. 좋은 사회공헌 아이디어가 있는데 돈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는 협력사에 자금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방식이다. 1차로 5개 협력사가 제안한 사회공헌 아이디어에 총 2억5000만원을 지원한다. 김정기 SK이노베이션 실장은 “단순한 지원을 넘어 협력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사회공헌활동 찾기는 업계에서 경쟁이 붙을 정도다. 현대모비스는 이날 클라우딩 컴퓨팅을 동반 성장에 도입했다. 협력사가 생산관리 시스템을 제각각 설치할 경우 돈이 많이 들어가는 점에 착안했다. 모비스가 공동 관리 시스템을 설치하고 협력사는 온라인으로 이 시스템을 활용하는 형태다. 협력업체인 우성파워텍의 정정훈 대표는 “품질관리를 위해 생산 관리시스템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중소기업 입장에선 벅찬 투자”라며 “모비스 시스템을 활용하면 공정관리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스템은 에너지 관리까지 하기 때문에 모비스 측은 협력업체 전체가 에너지를 10% 절감할 것으로 기대했다. 정부의 에너지 절약 지원사업으로 인해 협력사들은 1억5000만원가량의 정부 지원도 덤으로 받게 됐다.

 KCC는 자재는 KCC가 대고 시공은 동네 인테리어 업체가, 사후서비스(AS)는 KCC가 하는 ‘홈씨씨 파트너’ 제도를 운영 중이다. 협력은 하고 책임은 대기업이 지는 셈이다. 동네 지물포 지켜주기이기도 하다. 이 회사는 국민은행과 함께 120억원 규모의 동반 성장 펀드를 만들어 협력업체에 돈도 꿔준다.

 기업체별 특성을 살린 사회공헌의 브랜드화도 진행 중이다. 한화그룹은 그룹 성장동력인 태양광 사업을 활용하고 있다. 지역사회복지관 등에 태양광 발전 설비를 무료로 설치하는 사업에는 ‘해피 선샤인’이란 이름도 붙였다. 사회적기업도 친환경 아이템을 가진 기업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부품업체가 많은 현대차는 해외 진출을 통해 함께 커가는 전략을 펴고 있다. 현대·기아차 부품 업체의 지난해 수출액은 11년 전에 비해 7.9배나 증가했다. 현대·기아차 부품업체 287개사가 현대·기아차와 거래한 기간은 평균 27년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가장 성공적인 동반 성장은 대기업이 성장하면서 동시에 부품업체도 커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는 동반 성장이 대기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입증해 가고 있다. 포스코에 철강 절단용 칼을 공급하는 대원인물은 포스코의 후원을 받아 3년 만에 사용 수명이 3.5일에서 7일로 늘어난 칼을 만들었다. 이로써 포스코는 절단 장비를 교체하는 시간을 연 200시간 줄일 수 있었다. 절단용 칼의 품질 개선과 수입 대체에 따른 포스코의 원가절감 효과는 연 5억원에 이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이런 대·중소기업 성과 공유제 활용 기업 수는 지난해 6월 28개사에서 지난 6월 48개사로 늘었다. 성과 공유를 한 프로젝트는 1개당 5억1600만원의 비용절감 효과를 거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이 같은 움직임에는 그림자도 있다. 여러 기업의 총수가 재판 과정에 있고, 기업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따가운 데서 비롯된 활동이란 지적이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 재벌의 상생이나 동반 성장은 립서비스 느낌”이라며 “지금 발표한 상생 정책이 진정성이 있는지는 권력 누수가 생기는 대통령 임기 3년차 이후에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에선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4일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선 삼성전자와 주성엔지니어링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 대·중견·중소기업 20개사가 모였다. 이날 이들이 맺은 협약의 핵심은 ‘실적 점검’이다. 이들은 1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매년 정기적으로 상생 실적을 발표하고 점검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협약문에서 이를 ‘반도체 분야의 산업혁신 3.0’이라고 규정했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대·중소기업 간 협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영학부 교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한 보여주기 식이라 해도 의미 있는 변화”라며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식의 내실 있는 활동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상생협력은 필요하지만 기업이 본업인 경영보다 사회적 분위기의 눈치를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기업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야 성장의 과실도 커진다”고 말했다.

김영훈·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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