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 흡연 10대가 미끄럼틀·벤치 차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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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의 한 어린이공원. 미끄럼틀·그네 등 어린이를 위한 놀이시설이 설치돼 있지만 정작 어린이는 이날 오후 내내 보이지 않았다. [김성룡 기자]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의 한 어린이공원. 이날 공원엔 어린이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공원이란 명칭이 무색했다. 대신 한 취객이 그네 맞은편 벤치에 신발을 벗고 드러누워 코를 골았다. 노숙인 3명은 바닥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버려진 술병과 토사물이 공원 곳곳에 나뒹굴어 악취도 심했다.

 30일 중랑구의 한 어린이공원엔 교복을 입은 학생 3명이 구석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공원 바닥엔 담배꽁초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 50대 남성 2명은 아예 상의를 벗고 술에 취해 미끄럼틀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남성 취객은 벤치에 앉아 소주병을 들고 주변을 지나는 행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인근에 사는 주민 최혜정(45)씨는 “이름만 어린이공원이지 담배를 피우는 학생과 취객들의 놀이터가 됐다”며 “어린이는 물론 성인들도 머물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했다.

 어린이공원이 노숙인·취객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불량 청소년의 일탈장소로 전락하고 있다. 서울시내엔 모두 1028개의 어린이공원이 있다.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은 어린이공원에 대해 ‘어린이의 보건 및 정서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하기 위해 설치하는 공원’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28~30일 서울시내 어린이 공원 7곳을 직접 돌아보니 1곳을 제외하곤 어린이들이 뛰놀고 있는 곳이 없었다. 대신 노숙인·취객·불량 청소년 등이 몰리면서 동네의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변하고 있었다. 서대문구 창천동 바람산 어린이공원의 경우 폐쇄회로TV(CCTV)가 1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공원은 지난해 4월 10대 청소년들이 대학생 김모씨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지난해 서울지방경찰청은 ‘서울시내 공원 운영실태’를 발표하며 범죄에 취약한 공원 226곳 중 어린이공원 118곳(52%)을 꼽았다.

 올해 서울시는 시 공원 유지관리, 보수경비 등으로 170여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CCTV 등 공원 내 방범시설 관리를 위해 40여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예산 중 상당 비중이 어린이공원의 유지·관리를 위해 투입된다. 또 그네·시소·미끄럼틀 등 놀이시설의 안전점검과 보수에도 자치구별로 많게는 연 1억원가량의 예산을 투입한다.

 하지만 정작 이용하는 어린이가 없다 보니 세금이 낭비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포구에 사는 이희경(39)씨는 “대낮부터 취객들과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이 몰려드는 어린이공원에 아이를 보낼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며 “어린이집·키즈카페 등에 아이를 맡기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와 자치구는 공무원 탄력근무제와 자율방범대원을 통해 어린이공원을 순찰하고 있다. 그러나 인력 등의 한계로 인해 상시 관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시 공원녹지정책과 관계자는 “공원 관리 통합관제센터를 2015년까지 모든 자치구에 확대 구축하고, CCTV 사각지대를 없애는 등 실시간 모니터링도 개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영숙(아동복지학) 숙명여대 교수는 “어린이공원에 인근 주민·대학생 등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상주 인원을 배치하고, 노숙인과 취객 등의 음주행위를 철저히 단속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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