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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 징용 한국인|1,700명 「육탄 학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오끼나와=조동오 특파원】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한국인 1천7백명이 8·15 해방 직전 학살된 사건을 「오끼나와」 주둔 미군사령부에 근무하는 전 「코리언·리퍼블릭」 편집국장 김동선씨와 「튜뀨」 대학 역사학과가 공동 조사에 나섰다.
이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44년부터 「조선인」 무대가 「오끼나와」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나하」 시내 「소화」 여고에 대거 주둔했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고 항만에서 하역 작업과 진지 구축을 했으며 「오끼나와」에서 전쟁이 있을 때는 탄약과 식량을 운반했다.
종전 처리 자료를 보면 l945년 2월 중순 경량간 (게라마) 열도에는 해상정신전대 및 해상 기지 대대에 일부 배치되어 작업 원조 요원으로 「오끼나와」 본토로부터 전력이 없는 특설 수상 근무 중대 (조선인 군부 부대)가 파견됐다는 간단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 특설 수상 근무 중대는 제10l부터 제l04중대까지 있었고 장교나 하사관은 몇명 안되며 한국 인부들이 주력인데 구성 인원도 중대마다 다르나 대체로 3백명∼3백5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대구에서 편성, 1944년8월25일 「오끼나와」에 상륙했다.
이들이 사망한 것은 미군이 「오끼나와」에 상륙하기 직전 소형 선박에 폭발물을 싣고 한국인 인부를 같이 태워 미군 함정과 충돌케하여 거의 사망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이 「오끼나와」를 장악한 후 포로 수용소에 한국인 인부 3백50명 가량이 수용돼 있었는데 이들은 종전 후 거의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약 1천7백명이 「게라마」 열도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포로 수용소에 한국인 생존자와 같이 수용돼 있었던 「오끼나와」 적십자사 근무 「야마다·아리다까」씨에 의하면 당시의 수용소는 일본동 「오끼나와」동 한국동 등으로 분류해서 수용했었고 「가네야마」라는 한국인이 자치 대장을 하고 있었으며 「오끼나와」 전쟁 때 피해는 일본인으로 구성된 「건아대」와 「히메유리」 부대를 합쳐 7만5천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1만2천명, 항공기 피해가 2천3백대, 군함 침몰 l6척, 군함 피해 4척, 그밖에 10만 이상의 「오끼나와」 현민이 전화로 해를 입었다.
사망자는 「마부니까」에 안장했는데 일본은 각 현별로 현비를 세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 희생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찾는 자가 없어 묘지를 찾을 길도 없는 형편이다.
「오끼나와」 주민의 대안 감정은 동일한 피해 의식으로 좋은 편. 김동선씨는 한국인 희생자 넋을 달래기 위해 본국 정부에 호소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또 미국무성 발간 「제2차대전사」 중 「최후의 전쟁」이란 난에 2천3백35명의 일본 군인이 「게라마」섬을 지키고 있었는데 6백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3척의 소형 선박에 실려와 미군 선박에 부딪쳐 죽었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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