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신문주간에 돌아본「자주」수호의 기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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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국의 신문역사를 꿰뚫고 있는 선각자를 분형별로 나눠보면 정치가형과 계몽가형이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기자로 손꼽을 수 있는 분은 우강 양기탁이다.
한제국말기의 신문하면 누구나가 우선「대한매일신보」를 생각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외국의 침략세력과 추호의 타협도 없이 끝내 투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여러 국문 신문들이 국권을 수호하는데 열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나, 유독「대한매일신보」가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까닭은 양기탁과 같은 정치적인 혜안의 실천가가 있어 비로소 이룩된 것이다.
양기탁은<첫째>불법으로 강행한 일본의 사전검열을 거부하기위해 신문 발행인으로 영국인을 맞이했고, <둘째>침략자의 불법행위를 낱낱이 보도 평론했으며, <셋째>이러한 사실을 내외국인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같은 제호의 신문을 세 종류 발행했다. 즉 국·한문판의 「대한매일신보」, 국문판의「대한매일신보」, 그리고 영문판의「코리아·데일리·뉴스」가 그것이었다.
국권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것에 우선하므로 언론 역시 이에 총집중되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이에 앞장서서 용감히 싸운 양기탁이야말로 가장 인상적인 기자였다고 하겠다.
그는 전후 여섯 번에 걸쳐 영어의 몸이 되었고, 마침내 해외로 망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생을 마쳤다.
이처럼 그는 일생을 언론활동으로부터 국권의 수호, 다시 일한합병이후로는 독립투쟁으로 일관한 신념과 실천의 인사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불타는 신념과 실천력에 머리가 수그러짐을 깨닫게 된다. 사실 염기탁은 l908년 7월 12일밤 통감부의 언론탄압의 일환으로 구속되었을 때 당당히 자기의 주장을 내세워 일보도 타협한바가 없었다.
그것은 수집된 국채보상금을 양기탁이 횡령 소비했다는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내 영국 총영사의 엄중한 항의로 영일양국 정부간의 정치문제로 확대되었고, 이론에 몰린 통감부는 그해 8월 15일 양기탁을 대한의원에 입원시키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것은 구속할 이유가 없다는 영국측 항의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종로 감옥문을 나서자 그길로 대한매일신보사로 돌아왔다.
이에놀란 통감부당국은 영국 총영사에게 양기탁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이에 불응했다. 양기탁은 그후 8월 21일에야 비로소 인력거로 전기 의원에 입원, 동9월29일 공판에서 무죄 석방되었다.
요컨대 양기탁 구속 사건은 영일양국간의 정치적 해결로 일단락을 지었으나 그의 호탕한 행동은 국제적 기자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좋은 본보기 이기도하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라 신문기자도의 거울을 들여다볼 수가 있겠다.<중앙대교수·신문학>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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