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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란 휴전까지|아이젠하워 회고록「유혈의 종식」에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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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시와 평화시에 똑같이 만인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은 「아이젠하워」대통령. 특히 우리로서는 그가 한국전쟁을 휴전을 통해서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끊을수없는 인연이있다. 1일의 「아이젠하워」장례를 맞아 한국휴전협상당시 그와 이승만대통령이 일연탁생의 동맹관계이면서도 서로의 국가적 이익이란 차원에서 둘이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아이크회고록』(Mandate for Change 1953∼1956)의 『유혈의 종식』장에서 간추려살펴본다.
전쟁을 선포하는것은 늙은 세대이지만 전쟁터에서죽은것은 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전쟁후에 오는시련, 슬픔, 승리를 이어받아야할 사람들도 젊은이들이다. 「하버드·후버」(1944년 공화당대회에서)

<한국전 확대 암시>
한국휴전교섭은 중단된채 그리고 전투자체도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나로서는 이런상태를 그냥 방치할수없었다. 그래서 협상에서 만족할만한 진전이 없을경우 단호한 태도, 즉 전투를한반도밖에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을 인도 대만해협, 판문점을 통해 그들에게 암시해주었다. 이런 태도표시는효과를 거두어 공산측은 협상을 재개하고 상병포로교환에 동의했다.
1953년4월9일에 이승만대통령은 나에게 항의서한을 보내고 중공군이한반도에 남은채 휴전협정을 맺는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에 참가할 나라를 제외한 모든 동맹국에대해 한국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하겠다고 대들었다. 미군도 물러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이서한은 격렬한 내용이었으며 어구도 매우거친것이었다.
나는 이대통령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기위해 곧 회한을 냈다. 나는 인위적이며 부자연한한국분석을 종식시키려는 이박사와 한국민의 염원을 잘 알며 중공침략자를 쫓아버리겠다는 결의도 잘 이해한다고 동정을 표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 회한에서 한국에대한 무력침략이 격퇴된이상 평화적 수단에의해 나머지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명예로운 전문중지를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5월30일에 이대통령은 다시 나에게 서한을 보내고 중공군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은 『한국에대한 항고권없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방위조약을 요구>
이박사는 휴전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한국군의 대폭증강, 미해공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한국민은 끝까지 싸우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이유는 모든한국인으로서는 국토가 분단된채로의 휴전이나 평화보다는 최후까지 싸우는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나는 회한에서 휴전될때 비율빈이나 호주와 맺은것과같은 방위조약을 체결할 용의가있으며 미국은 전쟁으로 황폐화한 한국부흥을위해 경제원조를 계속하겠으나 이것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박사, 초청 사양>
이시기에 이대통령의 미국방문이 필요하다고 느꼈으므로 그를 초청했지만 잠시도 한국을 떠날수없다는 이유로 그는 이를 사양하고 오히려「덜레스」장군의 방한을 요청했다. 나는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해서 「월터·로버트슨」국방차관보를 서울로 보내기로했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시기에 경부동지할만한사태가 발생했다. 2만5천명의 비공산당원포로가 탈출한것이다.
이승만정부는 이사건에관련했음을 인정했다. 이박사의 반공포로석방은 우리가 몇달걸려 북괴와 중공에대해 주장해온 입장의 기초를 무너뜨리는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당사국의 하나가 되는 협정을 지킬수있겠는가라고 공산측은 반문해왔다.

<불굴의 인내 필요>
사건발생날 나는 국무성을통해 이대통령에게 강경한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각서내용은 공표되지않았다.
「로버트슨」특사는 서울로 급행해서 이박사와 담판을 시작했다. 그 교섭은 최대한의 흥정과 외교수완과 불굴의 인내가 필요했다. 「로버트슨」은 연일 대단한 애국자이지만 정말 상대하기 힘든완강한 이노박사에대해 협조를 호소했다. 마침내7월12일에 이박사는 공식으로 미국과의 협력을 약속했다. 이로부터 며칠동안 동부전선에서는 일대격전이 벌어졌으나 드디어 7월27일에 휴전협정은 조인됐다. 이것은 세계의 감정과 정치정세로보아 거의 해결불가능으로 생각하던 문제에대해 우리가 받아들이수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한국민 용기 증명>
이날 나는 한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나는 우리와함께 싸운 21개국의 장병, 특히 한국의 용감한 군대를 상기한다고 말했다.
이승만박사는 나로하여금 어지간히 인내심을 시험한 셈이지만 역시 그에게 찬탄을 표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투철한 전투정신으로 한국군의 사기를 드높인것이다.
한국군은 자유의 전사라는것을 증명했을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사람에게 용기와 애국심의 모범을 보였고 자유국가의 장병들이 단결해서 자유를 위해 싸울수있다는 실례를 남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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