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지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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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예부터 서민사이에서 제일 인기있던 인물로는 홍길동을 따를 사람이없다. 그는 축지법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인술을 써가며 강자를 곯려주고 약자를 도왔다.
인술의 「인」은 원래는 도교에서 나온 말이며, 물체를 이용해서 변화하고 둔갑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것이 금둔·목둔·수둔·화둔·토둔등 이른바 오둔의 술이다. 여섯차례나 자진 출두하겠다고 검찰을 우롱해오던 전문화재관리국장 하갑청씨가 드디어 23일하오에 검거됐다 한다. 용케 잡았다고 하기에 앞서 그는 무슨 인·술을 썼기에 열홀씩이나 숨어다닐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영상의 발부와함께 자취를 감춘다는 것은 스스로 혐의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묘하게도 고위고관의 경우는 한동안 둔갑하고 있다가 「자진출두」하겠다는 통지를 내는 버릇이 있다.
보약이라도 먼저 먹어둬야겠다는 마음에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버릇이 고관에 대한 당연한 예우를 기대하고 있기때문이라면 한심스런 일이다.
원래가 현직고관이라는 감투는 훌륭한 차와 의관처럼, 외부에서부터 그 인간에게 부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 그자체와는 관계없는 것에 자기를 종속시키는 것을 「도치의 민」이라고 장자는 비꼬고 그와같은 인간을 썩은 쥐나 다름없다고 비유한 적도 있다.
이런 「도치의 민」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흔한 것같다. 여기서 병든 특권의식이 생겨나고 또 그런 특권의식이 그런대로 통용될수 있다는데 우리네 사회의 딱한 사정이 있는가 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알맹이가 너절해도 훌륭한차나 관만 갖고있으면 명사가 되어, 버젓이 신사록에 이름이 오른다.
옛날처럼 양반이나 문벌을 가리지 않게 된것은 그만큼 민주화한 덕분이라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가령 영국에서처럼, 지도부에 특유한 「노블레스·오볼리즈」라는 책무감은별로 찾아볼수 없다는것은한심한일이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영미사회에서의「소시얼·레지스터」라는 명사록이다. 여기에는 미국에서도 3대전의 선조까지를 따져서 이름이 오르게 된다. 이런 질서가 없기때문에 우리네 상층사회가 부패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파렴치한 죄를 범하고서도 고관들은 얼마후엔 흔히 또 명사다운행세를 할수 있게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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