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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빅브러더, 한국은 왜 조용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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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왜 한국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로 불리는지 알 거 같습니다. 프리즘(Prism)에 대해 정부도, 언론도, 시민단체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한국 담당 요원이 동향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이렇게 시작하지 않을까. 프리즘이 뭐냐고 묻는 분도 있을 터. 프리즘은 정보 감시 시스템이다. 미국 정부는 이 시스템을 통해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페이스북 등 IT 기업 중앙 서버에서 내·외국인 정보를 수집해왔다. 지난 3월 한 달에만 970억 건이었다.

 전직 중앙정보국(CIA) 직원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미국, 유럽연합(EU), 중국에 연쇄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빅브러더’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반발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잠잠하다. 너무 먼 얘기여서일까.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이런 예를 들었다. 유튜브에서 참수형 동영상을 본 뒤 형제에게 값싼 압력밥솥(pressure cooker)을 찾지 못했다는 e메일을 보낸다면 프리즘의 감시 대상이 될 수 있다. 압력밥솥은 지난 4월 보스턴 테러에 사용된 바 있다. 만약 당신이 유튜브에서 북한 김정은, 미사일 동영상을 본 다음 압력밥솥이나 폭탄주, 뇌관, 직격탄을 검색한다면?

 적어도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은 관리 대상 아니겠느냐는 게 상당수 IT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은 “미국에선 경제가 국가안보의 중요한 축”이라며 “한국 기업도 대상이 됐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가능성이 다분한데 ‘양들의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뭘까. 더욱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 호된 홍역을 치른 나라 아닌가. 프리즘 논란에 조용한 이유를 정태명(컴퓨터공학) 성균관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만큼 프라이버시(사생활) 문제에 둔감한 거죠. 당장 경제적·정신적 피해가 없으면 무관심해요. 천만 건, 몇 백만 건씩 유출돼도 하루 이틀 시끄럽다 말잖습니까. 그런 점에서 한국 사람들, 정말 착해요.”

 문제는 착한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구글 검색엔진은 이용자 성향과 관심사를 추적해 맞춤 정보를 제공한다. 같은 영국 석유 시추회사를 검색해도 영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한 사람에겐 석유 누출 사고 뉴스가, 다른 사람에게는 투자 정보가 뜬다. 이런 필터링(여과) 과정을 거치면 점점 더 자신만의 편협한 정보세계에 갇히게 되고, 기업이나 특정 정치세력의 입맛대로 생각과 의견이 조종될 가능성이 크다. (『생각조종자들』)

 데이터만 충분하다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다. 나아가 우리의 정부가 시민의 사생활을 엿보고, 여론을 조작하려 할 수도 있다. 기술이 가능해지면 어떻게든 활용하고 싶은 게 권력의 속성이다. 또한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보듯 좋은 명분 아래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이다.

 앞서 소개한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정부는 구글보다 덜 알아야 하는가.” 미국 정부도, 구글도 축적·분류해 놓은 온라인 정보를 활용하는 건 마찬가지란 얘기다. 김대식(뇌과학) KAIST 교수는 “개인정보에 대한 통제권을 기업이나 정치권력에 양보하면 결국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프리즘은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인식의 구멍을 드러내는 거울이요, 곧 다가올 미래를 보여주는 예고편이다.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보 주권이 다른 나라에 넘어가고, 스스로 삶을 결정할 권리가 비즈니스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이 많지 않다. 빅브러더를 막을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첨단 기술에 사생활의 공간을 넘겨주다 보면 우린 도마 위에서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생선 신세가 될 것이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