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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랄」군의 감기-장부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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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 상점 진열장 안으로 보이는 텔리비젼 화면에서는 마침 어린이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읍니다. 여러번 보아서 이젠 낮이 익어버린 얼굴이 예쁘고 상냥한 아나운서 아줌마가, 구슬처럼 돌돌 굴러가는 듯한 그 맑은 목소리로 어린이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인조 인간 리베랄 군이 감기에 걸려 누워 있다고 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리베랄 군은 오늘 아침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부는 집밖에서 잠옷만 입은 채로 체조를 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고열이 나고 재채기를 심하게 하며, 헛소리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리베랄」군을 진찰한 근처의 의사 선생님은 심한 감기의 증상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만 리베랄 군을 발명하신 세계적인 과학자 김 박사께서는 리베랄 군은 이 세상에 만들어질 때부터 감기 같은 것은 걸리지 않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며 리베랄 군이 갑자기 그러한 증상을 나타내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곧 연구해 보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어린이 여러분. 우리는 다 함께 복돌이와 우리들 모두의 다정한 친구인「리베랄」이 한시바삐 건강을 되찾도록 기원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텔리비젼 화면 하나 가득히 복돌이와 리베랄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이 보여지다가 리베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고 그 옆에 북돌이의 아버지 김 박사와 의사 선생님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간호하고 있는 모습이 비쳐졌읍니다.
복돌이는 그만 풀이 죽어서 그 차가운 상점 진열장 유리창에서 얼굴을 떼고 돌아섰읍니다.
어느덧 날은 어두워 오고 있었습니다. 깜박깜박 하얀 별들이 장난꾸러기들처럼 얼굴을 조금만 내밀고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복돌이는 눈물이날 것만 같았읍니다.
『「리베랄」, 정말 미안해.』
아무리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려 보아도 복돌이의 무거운 마음은 조금도 가셔지지 않았읍니다.
울긋불긋 반짝이는 「네온사인」의 글자가 눈물에 어려서 마치 수많은 무지개가 걸린 것처럼 눈앞에 펼쳐져 보였습니다. 길을 따라 밝게 켜져 있는 수온등 아래로 열병식 하는 군대처럼 죽 늘어선 가로수의 앙상한 가시들이 꼬옥 회초리를 들고 서서 자기의 종아리를 때려 줄 것만 같이 복돌이에게는 느껴졌읍니다.
정말로 그네들이 자기를 때려준대도 그 벌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라고 복돌이는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복돌이는 「리베랄」에게 지금 심한 아픔을 주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쯤 「리베랄」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을까. …내가 잘못했어. 「리베랄」아.』 복돌이는 거의 울먹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루종일 밥도 먹지 않고 이렇게 거리를 싸다니고 있는데도 복돌이는 배가 고픈 줄도, 다리가 아픈 줄도, 그리고 추운 줄도 몰랐읍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리베랄에게 용서를 받을 수가 있을까하는 것만 생각했읍니다.
리베랄은 외톨박이인 복돌이를 위해서 아버지 김 박사가 만들어 준, 복돌이하고 똑같이 생겨서 쌍둥이 형제 같은 인조 인간입니마. 비록 인조 인간이긴 하지만 보통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고 또 보통 사람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하는, 이를테면 거의 완전한 사람입니다. 「거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리베랄에겐 잔등에 자명종 시계처럼 태엽이 달려 있어 매일 한번씩 태엽을 감아줘야 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확실히 김 박사는 세계적인 위대한 과학자입니다. 김 박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모든 사람에게 널리 이용되고 또 옳은 일에만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물건을 발명하는 일인데,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항상 쓸쓸하게 지내야 하는 아들 복돌이가 보기에 딱했던지 「리베랄」을 오로지 복돌이의 친구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사실 김 박사는 대단히 바쁘시기 때문에 어리고 철부지인 복돌이를 상대해서 놀아줄 수가 없읍니다.
김 박사가 「리베랄」을 다 만드셔 복돌이에게 데려왔을 때, 복돌이는 한참동안이나 입을 벌린 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그것은 「리베랄」이 복돌이 자기와 너무도 꼭같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내 이름은 「리베랄」이야. 앞으로 서로 잘 지내자.』
『난 북돌이야. 네 이름은 꼬부랑말이로구나.』
『응, 아버지가 지어 준거야.』「리베랄」도 복돌이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읍니다. 복돌이는 동생을 하나 얻은 것처럼 기뻤읍니다.
『리베랄. 이젠부턴 네가 내 동생이다.』
『아니야. 복돌이 네가 내동생이다.』 리베랄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아버지 김 박사는 옆에서 그 기다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허허하고 웃고만 계셨읍니다. 리베랄은 한참을 복돌이와 승강이를 하다가 아주 좋은 타협안을 내놓았읍니다.
「복돌아,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들 서로가 형이 되고 또 동생도 되자.』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참으로 타당하고 어른스런 생각이었으므로 복돌이는 쾌히 응낙했읍니다.
그 후로 복돌이는 정말 즐거운 하루 하루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아버지하고만 쓸쓸하게 마주하던 식탁에도 「리베랄」이 끼이면서부터는 아주 명랑한 이야기꽃과 웃음꽃으로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읍니다. 늘 조용하기만 하면 복돌이네 집안은 이제야 「리베랄」과 복돌이의 떠들고 웃고 뛰어 다니는 소리로 생기에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항상 바쁘셔서 복돌이를 돌보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복돌이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을 함께 가지고 있던 김 박사도 이젠 안심하고 연구에 골몰할 수 있었읍니다.
언젠가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물을 찾아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읍니다. 신기한 인조 인간 리베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기자들이 응접실에 모여 리베랄과 복돌이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때 「리베랄」은 복돌이에게 그네들을 곯려주자고 귓속말로 속삭였읍니다. 그리고 둘이는 어깨동무를 한채로 응접실에 들어섰습니다. 기다리던 기자들은 모두들 일어서서 인조 인간 리베랄을 서로 먼저 보려고 웅성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연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리베랄과 복돌이는 너무나 꼭같아 도무지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인조 인간 「리베랄」군입니까?』
이옥고 기자중의 한분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의젓한 목소리로 물었읍니다.
『제가 리베랄이에요.』
『아니예요. 제가 「리베랄」이에요.』
둘은 입을 모아 대답했읍니다. 그리고 마주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읍니다.
모여 있던 기자들은 어쩔줄 몰라 「허허 참』 『허허 참』하고 혀를 차기만 했읍니다.
이렇듯 리베랄은 복돌이에게 꼬옥 알맞은 개구장이 친구였읍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야말로 듬직한 형처럼 의젓한 보호자가 되기도 했읍니다.
복돌이가 란도셀을 메고 학교에 갈라치면, 리베랄 은 복돌이를 학교 문 앞까지 데려다 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복돌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이 리베랄은 아버지 김 박사의 연구실에서 김 박사의 잔심부름을 하다가, 복돌이의 학교 공부가 끝날 시각이면 학교 문 앞에서 기다려서 복돌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복돌이가 일찍 교문을 나서게 되는 때가 있거나, 늦게 나오는 때는 있어도 리베랄이 복돌이를 데리러 오는 것은 항상 시계 바늘처럼 정확했읍니다. 그 복잡한 건널목에서도 복돌이는 리베랄만 옆에 있으면 도무지 안심이었읍니다. 리베랄은 정말 어른처럼 주의 깊게 복돌이를 이끄는 것이었읍니다. 가끔씩 너무나 믿음직스러운 리베랄이 얄미워서 복돌이가 사람들 사이로 숨어버려도 리베랄은 용케도 복돌이를 찾아내어 건널목을 안전하게 건너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읍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둘이는 넓은 마당으로 나가 「캐치·볼」도 하고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는데, 「리베랄」은 복돌이가 아무리 엉터리로 던져도 틀림없이 볼을 잡아내고 그리고 리베랄이 던지는 「볼」은 복돌이가 아무리 한눈을 팔고 있어도 복돌이의 글로브에 정확하게 잡히는 것이었읍니다.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과 「캐치·볼」을 할 때, 복돌이는 곧잘 볼을 놓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이상스러웠읍니다. 아마도 「리베랄」은 신비하고도 굉장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복돌이는 아주 기분이 좋아 리베랄에게 말했읍니다.
『학교 친구들이 너를 만나자구 해, 리베랄.』
『그래? 복돌아 그럼 네가 아버지에게 여쭈어 봐.』
둘이는 김 박사에게 달려 갔습니다. 『아버지. 리베랄을 우리 반에서 초청했어요. 가도 괜찮아요?』
『아암, 괜찮구 말구.』
김 박사가 쾌히 승낙하자 둘은 띌 듯이 기뻐했읍니다. 더욱이 복돌이는 리베랄을 같은반 아이들에게 소개하며 자랑할 것을 생각하면서 그날 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정도였읍니다. 다음날 둘이서 학교에 갔을 때, 반 아이들은 모두 환호성을 울리며 리베랄을 맞이했습니다. 복돌이는 썩 마음이 흐뭇해서 어깨까지 으쓱이며 반 아이들에게 리베랄을 소개했습니다. 『나하고 형제인 리베랄이야.』
『텔레비에서 본 적이 있어. 이렇게 만나게 돼서 참 반가와.』
『고마와.』하며 「리베랄」은 아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읍니다.
『누가 형이니?』 들러서 있던 아이들 중에 누군가가 물었읍니다.
『어떨 때는 내가 형이고. 어떨 때는 리베랄이 형이야.』 복돌이는 서슴없이 대답했읍니다.
『뭐? 그런 법이 어딨어.』하며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습니다. 복돌이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리베랄은 다만 빙긋이 웃고만 있었읍니다. 그후로 리베랄은 복돌이를 데리러 와서 한참씩 학교에서 반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되었읍니다. 미끄럼도 타고 철봉틀에 매달려 여러 가지 묘기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도 했읍니다. 리베랄의 인기는 점점 대단하여졌습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리베랄의 친구가 되고 싶어했읍니다. 복돌이를 보고도 『어이, 리베랄.』하고 불렀읍니다. 그리고 호기심이 가득한 두눈을 자글거리며 손을 내밀기도 했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은 「리베랄」과 복돌이를 구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처음엔 그런 것이 무척 재미있었으나 복돌이는 이제 그만 귀찮아질 지경이었읍니다. 그리고 리베랄을 아이들에게 소개시켜주지 않았을 때에는 아이들의 부러워하는 관심이 복돌이 자기에게 쏠려 늘 자랑스러웠던 것이 이제 「리베랄」이 모두의 친구가 되어 버린 후부터는 아이들이 복돌이란 이름마저 잊어버린 듯 항상 리베랄만을 찾고 있는 것을 볼 때 조금 약이 오르기도 했읍니다. 그렇지만 복돌이는 리베랄이 자기와 제일 가까운 사이라고 늘 마음속에 다짐하고는 있었읍니다.
그런데 어느날 복돌이네 반 선생님은 갑자기 많은 숙제를 내 주셨읍니다. 그것은 보통 때보다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어휴』하고 혀를 내밀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복돌이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붙어 앉아 숙제를 하느라고 바빴읍니다. 리베랄도 옆에 앉아 복돌이가 숙제를 하는 사이 연필을 깎아 주기도 하면서 도와주었읍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앉아 공부하는 사이 복돌이는 어깨가 뻐근해오고 엉덩이가 쑤시기 시작했읍니다. 그렇다고 여느 때처럼 쉴 수 없는 것이, 그날치의 숙제는 밤잠도 줄여야 할 정도로 많은 분량이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좀이 쑤셔 오는 고통을 이를 꼭 물고 참아내면서 공부를 하다가 복돌이는 불현듯 리베랄이 자기를 대신해서 이 숙제를 조금 나누어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읍니다.
『리베랄아, 힘들어 죽겠어. 대신 숙제 좀 해주지 않을래?』
그러나 리베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읍니다.
『안돼. 그건 네 공부이니까.』
『허지만 너도 보다시피 오늘은 숙제가 너무 많잖니? 그러지 말고 좀해 줘.』
『내가 네 숙제를 대신해 주는 것은 너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결국 네게 해를 입히는 거란 말야.』 좀처럼 리베랄은 복돌이의 숙제를 대신 해줄 것 같지가 않았읍니다.
『그렇게 싫으면 그만 둬.』
복돌이는 리베랄이 갑자기 미워졌읍니다. 그럴듯하게 어른스런 말로 둘러대고 자기가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고소하다는 듯 보고만 있는 것 같았읍니다.
화가 났지만 복돌이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끙끙대면서 혼자서 숙제를 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리베랄에 대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겨우겨우 숙제를 다 끝맺고 복돌이는 리베랄에게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리베랄이 자기 방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복돌이는 쉽사리 땀을 이룰 수가 없었읍니다.
『흥 건방진 자식. 제까짓게 뭐라구.』
입 밖으로까지 리베랄을 욕해 보아도 화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으로는 먹구름이 피어나듯, 어떻게 하면 리베랄을 후련하게 끓려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오락가락하는 것이었지만 쉽사리 그럴듯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읍니다.
「리베랄」을 실컷 때려 줄까. 아주 고생스러운 일을 잔뜩 시킬까. 심한 무안을 당하게 할까. 생각은 생각의 교리를 물고 자꾸 떠올랐지만 복돌이는 도무지 만족할만한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었읍니다. 그러나 거의 새벽녘이 다 되었을 때, 복돌이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읍니다.
『그렇지, 리베랄을 내 종으로 만들어야지.』
복돌이는 입가에 빙긋이 웃음을 띠며, 리베랄의 잔등에 달려 있는 그 태엽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었읍니다.
사실 「리베랄」이 인조 인간이면서도 보통 사람들과 꼭같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잔등에 달려 있는 그 태엽 때문이었읍니다.
매일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 리베랄은 김 박사의 연구실로 가서 태엽을 감겨야 합니다. 김 박사는 다음날 복돌이와 리베랄의 생활 계획표를 미리 작성하고 거기에 맞춰서 「리베랄」의 잔등에 있는 태엽을 마치 「캐비니트」의 다이얼을 돌리 듯 이리저리 여러가지 숫자에 따라 감아주는 것이었읍니다. 말하자면 리베랄의 다음날 하루의 생활은 늘 전날밤 김 박사가 세심한 주의와 빈틈없는 계획으로 그 태업을 감아주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의 김 박사는 참으로 짧은 시간이지만 복돌이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로서의 깊은 사랑을 리베랄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김 박사는 리베랄의 태엽을 꼭 손수 감아 주는 것이었읍니다.
복돌이도 「리베랄」 이 태엽이 감겨야 보통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종으로 만들어 버릴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베랄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하기 싫은 숙제도 맡길 수 있고, 며칠에 한번씩 돌아오는 청소 당번도 대신 시킬 수 있고. 뿐 아니라 학교 가기가 공연히 싫어질 때는 자기 대신 출석을 메울 수도 있고 그리고 가끔씩 밉게 구는 아이들을 「리베랄」을 시켜서 때려 줄 수까지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복돌이는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 오도록 즐거운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복돌이는 「리베랄」의 태엽을 어떻게 돌리는지 그 방법을 모릅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복돌이는 아버지의 연구실로 갔습니다. 마침 아버지는 어디로 외출하셨는지 연구실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복돌이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복돌이는 마음을 턱 놓고 서류철을 넣어두는 서랍을 뒤져서 리베랄에 관한 서류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설계도를 몇장 넘기자 개미떼처럼 자잘한 글자가 쓰여져 있고 그 옆에 숫자가 적혀 있는 서류가 있었읍니다. 그것이 바로 리베랄의 생활 계획표였습니다 복돌이는 『야하』하고 환성을 울리며 한줄 한줄 읽어 내려 갔읍니다.
그러나 복돌이는 곧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서류에는 복돌이가 바라는 항목을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작해야 복돌이를 위해 연필을 깎아 준다, 옷에 뭍은 먼지를 털어준다. 비가 올 때는 우비를 가져다주고 우산을 받쳐준다 하는 식의 하찮은 항목뿐이었습니다. 조금 신통한 것으로는 복돌이가 불편할 땐 업어 준다는 항목이 있었읍니다. 복돌이는 쓴웃음이 절로 나왔읍니다. 그리고 하는 수없이 그러한 항목들의 번호라도 작은 메모지에 적어서 포키트에 넣고는, 서류를 제자리에 놓아두고 아버지의 연구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읍니다.
애초에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사실 하잘 것 없는 항목들이었지만 복돌이는 이제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읍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리베랄」의 태엽을 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읍니다.
드디어 어젯밤 복돌이는 밤늦도록 기회를 엿보았읍니다. 그러는 복돌이는 가슴이 「사이다」를 마실 때처럼 짜릿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읍니다. 아버지의 연구실을 다녀오는 「리베랄」의 발소리가 들리고 곧 문소리가 나며 「리베랄』의 방에 불을 끄는 「스위」 소리가 났읍니다. 「리베랄」은 자리에 눕기만 하면 이내 잠이 들고 맙니다. 그래도 복돌이는 잠시 기다리다가 살금살금 일어나서 복도로 나왔읍니다.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등을 구부리고 발끝으로만 소리 안나게 걸어서 「리베랄」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읍니다. 「스위치」를 켜자 불빛은 곤하게 자고 있는 「리베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읍니다. 평화롭게 자는 「리베랄」의 얼굴을 보자 복돌이는 가슴과 손이 조금씩 떨려옴을 느꼈읍니다. 그래도 복돌이는 용기를 내어 이 불을 들치고 「리베랄」을 돌려 누인 다음 잠옷을 걷어 올려서 잔등에 있는 그 태엽을 찾아냈읍니다. 태엽은 꼬옥 「캐비니트」의 다이얼처럼 둘레에 숫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복돌이는 쪽지에 적어놓은 번호를 보면서 이리저리 태엽을 돌렸읍니다.
몇개 안되는 숫자를 돌린 것이었지만 복돌이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솟아나 있었습니다. 태엽을 돌리는 일이 무척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기 때문에 복돌이는 자기 방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읍니다.
그리나 아침이 되자 복돌이는 리베랄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날보다 훨씬 일찍 눈이 떠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리베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통 때와 같이 일어났고 복돌이와 함께 세수를 하고 아침 식탁에 앉았읍니다.
조간 신문을 읽고 계시던 김 박사도 식탁에 앉자 여느 때처럼 즐거운 아침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복돌이는 그 사이 줄곧 「리베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이상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돌이도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고 어느덧 그 생각을 잊어버린 채 밥을 거의 다 먹고 있을 때였읍니다.
갑자기 「리베랄」이 숟가락을 입에 문채로 일어섰읍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뛰어가서 다시 잠옷을 걸쳐 입고 화장실로 뛰어들고 그곳서 양치질을 시작하다가는 도로 식탁으로 와서 앉았다가 이번에는 복돌이의 방으로 달려가 복돌이의 책들을 가져와 복돌이 앞에 펼쳐 놓기도 하였읍니다.
그러한 리베랄의 모습은 마치 무성 영화를 볼 때처럼 통통거리는 소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복돌이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 진 채 「리베랄」을 지켜 볼 수밖에는 없었읍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리베랄은 이번에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마땅한 가운데 서서 체조를 시작했읍니다.
그 체조는 복돌이가 이제껏 본적이 없는 실로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팔을 휘두르다가는 갑자기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다리를 묘한 자세로 꼬아보기도 했읍니다.
그러다가 리베랄은 아차 하는 사이 그만 미끄러져 마당에 자빠졌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놀란 나머지 그냥 멍하게 서있기만 하던 아버지와 복돌이는 그제야 뛰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리베랄」을 번쩍 들어 안아 올리신 아버지는 복돌이에게 말했읍니다.
『복돌아. 어서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오너라.』
의사 선생님을 모시고 뛰어오면서 복돌이는 자기가 저질러놓은 장난이 이러한 사태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의사 선생님이 진찰을 하는 사이에도 리베랄은 꿍꿍거리면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복돌이는 그 이상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복돌이는 그만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왔던 것입니다.
바람이 차갑게 불었습니다. 눈물자국으로 찬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복돌이는 얼굴이 따갑게 아파 왔습니다. 발이 시려 오더니 이젠 온 몸이 싸늘하게 춥기도 했습니다. 속이 비어서인지 후들후들 떨리는 것도 같았읍니다.
『용서해줘. 「리베랄」.』
복돌이는 벌써 몇백번이나 이렇게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차가운 밤하늘은 그것을 냉랭하게 삼켜버릴 뿐이었읍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어느덧 복돌이는 어느 로터리에 닿았습니다. 어디로 갈까 복돌이는 망설였습니다. 복돌이는 갑자기 자신이 처량해졌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서글퍼지는 것이었읍니다. 로터리 한쪽 편으로 유리창에 서리가 하얗게 핀 꽃가게가 있었읍니다.
예쁜 꽃이라도 한 묶음 사가지고 가서 리베랄의 병문안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복돌이는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복돌이로서는 그럴 수도 없습니다. 복돌이는 더욱더 슬퍼질 뿐이었습니다. 마치 이 춥고 낮선 거리에 홀로 동그마니 버림받은 외로운 아이 같기만 했읍니다.
그때 어느 전파사의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 나왔읍니다.
『오늘 아침 갑작스럽게 감기에 걸려 앓고 있던 인조 인간 리베랄 군은 이 시간 현재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리베랄 군을 발명한 김 박사는 그 발병 원인을 다이얼의 번호 착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김 박사의 아들 복돌 군을 찾고 있습니다. 복돌 군은 리베랄 군이 감기로 자리에 눕자 집을 나갔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복돌 군은 곧 집으로 돌아가서 걱정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기 바랍니다. 다음….』
복돌이는 로터리 한쪽에서 그 방송을 듣다가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깡깽이의 황홀한 최면>당선 소감-장부일
친구여, 눈 덮인 산골짝 어느 구석에 유배당하듯 우울하게 묻혀 있는 나의 친구여. 너는 듣는가. 내가 켜고 있는 이 「깡깽이」 소리를. 처량하도록 가늘고 불안스런 음악의 흐느끼는 선율을. 그것은 네가 항상 걱정스런 눈짓으로 지켜보던 악보 없는 나의 「노래」이지.
우리들의 순수하고도 작은 혈연들을 이 사납고 비정한 거리에 방치할 수는 없지. 그래-. 어린날 우리가 뛰놀던 그 아름다운 꿈속 같은 고향, 언제나 무지개가 포근하게 우리를 감싸안아 주던 곳. 그 동굴 속으로 그들을 유인해야 하지. 나는 「깡깽이」를 들고 그들에게 황홀한 최면을 걸어 그곳으로 인도할 작정이지.
친구여, 이제 나의 연주를 지휘한 「컨덕터」-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내 감사하기로 하자. <약력> ▲1946년 함흥 출생 ▲서울고등학교 졸업 (64년) ▲제6회 「경희 문학상」 수상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4년 재학 ▲「동정」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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