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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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제는 모두 미진을 안은채 좋건 궂건 집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들었을 시간이다. 한해를 충실하게 산 다행한 이들은 이미 단잠을 이루었을지 모르고 나처럼 허둥지둥 하다 세월을 보낸 이들은 이 역시 나처럼 눈을 말똥말똥 뜨고 몸을 뒤채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망년회 몇 잔 술에 춰해 『생각하면 골치』라는 회피와 체념에서 일찍 곯아 멀어 졌는지도 모르겠다.
글줄이나 쓰고 사는 나 같은 사람이야 세월에다 그리 큰 포부나 계획을 걸어온 것도 아니요, 또 세월에 속을 이 만큼 그리 천진스럽지도 않고, 또 이제 한 살 더 먹어보았자 그리 한스러울 나이도 자랑스러울 나이도 아니다.
실장 지급 나에게 하다 놓친 큰 사업이 있는 것도 아니요. 졸릴만한 빚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어느 누구와 원수를 맺고 해를 넘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난해는 고질이 있는 몸으로서는 그런 대로 소강을 유지해왔고 소업에도 게으른 편은 아니었고 가족들도 탈없이 제구실을 다하였다. 그런데도 내 가슴 저밑둥에서 회오리 눈보라처럼 쳐오는 이 허전과 아쉬움은 무엇 때문일까? 곰곰 따져 솔직이 고백하면 이것은 대가 아직도 확신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연유한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지만 그 교리와 교회 의식에 익숙할 뿐 엄밀히 자기를 반성하면 신앙을 안 가진 사람과 다를바 없고, 글을 쓴다지만 자기로의 사상이나 달관은 없이 천박한 지식이나 일시적인 느낌이나 투철치 못한 직관만에 의지하여 메워가고 있는 자기를 살필 때 자기 삶의 공전을 안 느낄 수가 없다.
이런 나에게 이 밤에 진실하고도 절실한 염원을 새우라면 그 무엇일까? 입밖에 내기 쑥스럽지만 비의에나 접하지 않고선 내일부터의 감에 아무 해결도 있을 것 같지 않다. 홀연 대오! 그래서 새해엔 저20세기 은총의 시인 「폴·클로델」처럼 황금빛 시를 써보는 것이리라. 이러지 않고선 나의 삶은 공전의 거듭이요. 거기에 따른 나의 소업이나 소위도 도로에 끝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도그머」보다도 더 뚜렷이 신의 비의를 체험했다는 「폴·클로델」도 『너희가 신을 알았을 때 신은 한시도 너희를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신의 체험이 결코 안온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고. 또 중국의 어떤 상승이 견성한 뒤에 『깨치고 보아야 별 것이 아니었네. 노산은(여전히) 안개로 덮이고 절강은(여전히) 파도가치네』(도득제내무별사, 노산연우절강조)하더란다.
그러나 내가 이렇듯 삶의 근본 변경이나 하려는 듯 덤비는 태도가 우스꽝 스러운게 아닐까. 형이상적 발돋움도 형이하적 허욕과 매일반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랴.
『뎅, 뎅, 뎅』 제야의 인경소리가 울려온다. 옆방의,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쌕쌕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나는 이제 소박한 나로 되들아 온다. 이 밤을 가족과 함께 이렇다할 불행도 없이 굶주림도 없이 따뜻한 거처에 자리한 것부터 감사한 생각이. 든다.
이제야 정말 회오에 밀려 일어나 성상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소박한 꿈과 신뢰를 가지고 합장한다. 【구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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