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매실에 설탕 듬뿍 … 1년 묵히면 '식탁의 감초' 매실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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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청을 담그는 시범을 보여주는 배천 조씨 종부 김현숙씨. 매실과 황설탕을 섞어 버무리고 있다. 본격적인 매실청 담그기는 6월말∼7월초 끝물 매실 500㎏을 사서 할 계획이다.

늦가을이 김장철이라면 초여름은 매실청철이다. 제철 맞은 초록 매실이 시장에 나오면서 황색 설탕까지 덩달아 바빠졌다. “매실(청) 담갔냐”가 주부들 사이에 인사가 됐을 만큼 이제 매실청은 보편적 식재료로 자리매김했다. 청(淸)의 어떤 매력 때문일까. 그 답을 알기 위해 배천 조(趙)씨 종부 김현숙(59)씨를 찾아갔다. 김씨는 16년 전 경기도 김포에 있는 종갓집을 한정식집 ‘고가’로 꾸미고, 100여 개의 장독에 청과 식초·장을 직접 담가 음식을 만드는 발효음식 전문가다. 매실청 얘기를 꺼내자 김씨는 “지금 담그는 매실청, 꼭 1년 이상 묵혔다 먹어라”는 말부터 했다.

“1차 발효만 끝난 상태에서 먹으면 충분히 발효가 안 돼 설탕시럽과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실뿐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식재료는 모두 청이 될 수 있다”면서 “청은 자연이 주고 시간이 만든 음식”이라고 했다. 그에게서 신비한 음식, 청의 세계를 들어봤다.

김현숙씨가 1차 발효 중인 청 항아리에서 건더기를 건져 보여주고 있다. 왼쪽부터 민들레청ㆍ인삼청ㆍ톳청.

발효의 신비 … 청은 인체대사 돕는 효소 역할

‘청(淸)’은 원래 ‘꿀’을 뜻하는 궁중용어다. 유자나 모과·매실 등을 꿀에 재어 숙성시켜 얻어낸 맑은 즙을 일컫는다. 최근엔 꿀 대신 설탕을 이용해 저렴하게 청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청은 흔히 ‘효소’로 불리기도 한다. ‘효소 담갔다’ ‘효소액 넣었다’ 등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있다. 효소는 각종 화학반응에서 촉매 역할을 하는 단백질이다. 음식의 소화와 흡수, 노폐물 배출, 살균 작용 등 인체에서 일어나는 각종 대사과정에 관여를 한다.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아밀라아제, 혈전을 녹이는 나토키나아제 등이 효소다. 엄밀히 말해 청과 효소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도 청을 효소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청에서 효소의 작용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효의 결과다.

과일·채소를 설탕에 재워두면 삼투압 작용에 의해 원재료의 즙이 흘러나온다. 그 속에 있는 다양한 효소와 미생물이 설탕을 먹잇감 삼아 발효를 시작하고, 그 결과 인체에 유용한 영양성분이 만들어진다. 청의 어떤 성분이 효소 작용을 하는지는 아직 모두 밝혀지지 않았지만, 청의 효능은 이미 여러 연구 결과에서 증명됐다. 2010년 신라대 식품영양학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미자와 설탕을 섞어 6개월 동안 발효시켜 만든 청에서 항산화 효소와 항균 효소의 효과가 나타났다. 또 2012년 대구한의대의 마늘청 연구 결과에선 청이 항균·항산화 효소 작용뿐 아니라 혈전용해효소의 작용까지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청이 건강식품으로 주목받는 이유다.

청은 식재료로서도 활용도가 높다. 우선 물에 희석시켜 음료로 마시기 좋다. 단 뜨거운 물에 섞으면 효소가 파괴돼 생리 활성 능력이 떨어진다. 청은 설탕이나 물엿 대신 요리에 활용하기 좋다. 자칫 음식과 겉돌 수 있은 원재료 특유의 맛이나 향이 청에선 한결 부드러워진다. 발효과정을 통해 맛이 깊어져서다. 일례로 갈비찜 양념을 할 때 생마늘을 찧어 넣으면 별도의 숙성 시간이 필요하지만 마늘청을 넣으면 숙성시키지 않아도 고기와 양념의 맛이 잘 어우러진다. 또 1차 발효 후 건져낸 달짝지근한 건더기는 샐러드 등의 요리에 가니시(고명)로 활용하기 안성맞춤이다. 매실청 건더기를 곱게 다져 주먹밥 만들 때 넣어도 맛이 좋다.

1년 열두 달 담그는 청 … 보관 땐 햇빛 피해야

아래 작은 사진 역시 김씨가 만든 다양한 청으로, 가시오가피청ㆍ생강청ㆍ레몬청·모과청ㆍ흑마늘청(왼쪽부터)이다.

김현숙씨는 사시사철 청을 담근다. 1월엔 함초청, 2월엔 칡청, 3월엔 도라지청, 4월엔 아카시아꽃청, 5월엔 두메부추청, 6월엔 복분자청, 7월엔 백년초청, 8월엔 다래청, 9월엔 구기자청, 10월엔 유자청, 11월엔 생강청, 12월엔 모과청 등 다달이 일정도 잡아뒀다. 청 담그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똑같다. 설탕에 재어 1차 발효시키고, 건더기를 걸러낸 뒤 2차 발효를 시키면 된다. 하지만 설탕 양과 1차 발효 기간 등을 재료에 맞게 맞추는 게 까다롭다. 김씨는 “조건이 맞지 않아 발효가 되지 않고 썩어버린 항아리도 꽤 많았다”고 전했다.

설탕 양은 재료의 수분 함량에 따라 정해진다. 수분이 많은 재료는 설탕의 양도 많아야 하고, 수분이 적은 재료는 설탕의 양도 적어야 한다. 새싹이나 꽃으로 청을 담글 때는 설탕 양을 재료 무게의 25∼30% 선에 맞추면 되고, 곰취·냉이·돌나물 등 식물 잎이나 껍질·뿌리 등을 사용할 때는 설탕을 재료의 50% 선에서 넣는다. 오미자·무화과 등 열매를 사용할 때는 대부분 100%를 기준으로 삼지만, 사과·배 등 당도가 높은 과일의 경우엔 설탕 양을 재료의 70~80% 선까지 낮춘다. 또 홍삼 등 말린 재료로 청을 만들 때는 설탕 대신 시럽이나 미리 만들어둔 다른 청을 사용하는 게 좋다. 1차 발효 기간은 대부분 석 달이 기준이지만, 재료에 따라 예외도 많다. 도라지·더덕·인삼 등은 1년 후에 거르고, 오디·복숭아처럼 물컹물컹한 과일은 2개월 후에 건더기를 걸러낸다. 또 톳·다시마 등 해조류로 청을 담글 때는 1차 발효기간을 4∼5개월 정도로 잡는다.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한꺼번에 이용해 청을 담그기도 한다. 배와 도라지는 함께 사용하기 좋은 재료다. 배는 껍질을 벗기고 씨를 뺀 뒤 큼직하게 썰어 넣고, 도라지는 깨끗이 씻어 물기를 빼 사용한다. 이들 재료를 설탕에 버무려 1차 발효시키고, 1년 후에 걸러 2차 발효에 들어간다. 설탕 양은 재료 무게와 같은 양으로 맞춘다.

청을 보관할 때 피해야 할 것은 햇빛이다. 햇빛은 효소의 활성을 떨어뜨린다. 또 2차 발효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냉장고에 집어 넣어도 안 된다. 청을 냉장고 안에 넣으면 발효가 중단돼 미완성 발효액이 된다. 청 담근 지 1년이 될 때까지는 20도를 유지하는 게 좋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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