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지만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아무리 변화무상한 남북관계라지만 어렵사리 합의된 대화가 이렇게 허망하게 무산되다니.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크다. 수석대표의 격(格)이 발단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대표의 격을 중시하고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천명했다. 지당한 말이다. 형식은 대표의 격을 맞추는 예의에서 시작된다. 유교사상에서도 나를 넘어서 예를 실천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우주적, 국제간, 개인간의 조화를 위한 핵심적인 절차(protocol)라고 가르친다. 공산주의 혁명 한다는 사람들의 “나만 옳다”는 무례는 혁명이 사라진 지금도 정신착란으로 살아남아서 도처에서 말썽을 부린다. 김정은의 특사로 중국에 간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용해가 군복 차림으로 설치다가 그 무례함을 엄하게 지적받고 시진핑 만날 때 인민복을 입은 일화는 그들의 무례에 제동이 걸린 드문 사례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박 대통령의 말도 이런 배경에서 타당하다. 아마도 박 대통령이나 그의 참모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게 아닌가 싶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에서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고,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칸트 말의 앞부분만 반영한 것이다. 칸트는 내용과 형식의 조화·일치를 강조한 것인데 박 대통령은 형식의 중요성만 과장되게 강조하고 있다. 내용의 진정성이 형식에 반영된다는 점이 무시되었다. 남북관계에서 형식의 지배를 받는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건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의 생존의 문제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북에 두고 온 가족의 얼굴 한번 보고 싶은 고령 이산가족들의 인간적인 소원의 문제가 아닌가. 고상한 철학적 언사로 덮고 넘어갈 문제들이 아니다.

 격의 문제도 까다롭다. 우리가 북쪽 수석 되기를 희망하는 부총리급의 실세인 노동당 통전부장 김양건을 기준으로 하면 우리 통일부장관의 격이 떨어지고, 우리 통일부장관을 기준으로 하면 북한 노동당 외곽단체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은 너무 자격미달이다. 남북한의 지배구조가 달라 총리급이나 부총리급이 아닌 한 격을 수평으로 맞추기가 어렵다. 대화를 위해서 한쪽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국력에서 약자인 북한보다는 압도적 강자인 한국이 그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만나서 대화를 해야 신뢰를 쌓을 수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통일부장관의 직급의 높낮이가 아니라 그가 대북정책의 실세인가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그의 정책건의를 얼마나 수용하는가, 대통령은 그를 얼마나 자주 만나는가. 북한이 그를 실세가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하고 또 그건 사실에 가깝다. 남북대화는 긴 여정이다. 지금부터라도 통일부장관의 존재감을 대북정책에 관한 한 실세라는 말을 들을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2002년 일본 총리 고이즈미의 방북이 그걸 추진한 참모의 치밀한 실세 만들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철저히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하고 싶지 않은 남한과의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방어를 위한 미국의 억지력 강화·유지가 확인되고,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여 김정은의 입지는 극도로 축소되었다. 중국에 의한 “북핵 불용”의 의지는 이달 말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다시 확인될 전망이다. 김정은으로서는 대외적으로는 대화의 제스처로 중국을 무마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대내적으로는 체면을 지키는 선에서 개성공단을 재가동하고 싶다. 그래서 남북대화에 응하기는 하지만 싸우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모래판에 끌려 나온 씨름꾼처럼 샅바싸움으로 시간을 끌려다 판을 깨고 말았다.

 북한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의미 있는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북한 버릇 고치기가 교각살우까지 가서도 문제다. 만나서 대화를 해야 신뢰 쌓기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꼭 김양건이 나오기를 바란다면 그가 나올 수 있는 조건을 우리가 만들어서 북한에 팔아야 한다. 생산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김양건이 갖고 올 타이틀을 신축성 있게 조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남북대화에 기대를 걸고 있는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과 고령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급할 것 없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청와대 관리들의 언동은 너무 한가하다. 당국회담 무산의 책임이 남북한 모두에게 있다는 양비론을 북한에 면죄부 준다고 규탄하는 것도 속 좁고 부당한 공론탄압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